2021년 11월 2일 화요일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다

 

누가복음 1038-42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개역개정,한글)

 

'그들이 길을 가시는 때, 예수께서 어떤 마음에 들어가시니 마르다라 하는 여인, 이를 영접하여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그 자매로 마리아라 하는 이가 있었다. 예수의 발아래 앉아 그 말씀을 들었다.

40) 마르다, 대접하는 일 많아 마음이 분주해져, 예수께서 와서 말하기를, 주여 내 자매가 나를, 혼자 일하게 하시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시는 지요? 그에게 명하여 나를 돕게 하소서.

41)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것으로 염려하여 피로해졌다.

42) 하지만 없어서 안 될 것은 하나이다. 마리아는 이미 좋은 몫을 택했다. 이것은 그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누가복음 10:38-42일역)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 능력에 있는 것이다'(고린도전서 4:20)

 

'그들이 길을 가시는 때'

예수께서 제자와 함께 전도 위해, 여기저기를 편력하시고 있는 동안에.

 

'어떤 마을'

예루살렘부근의 베다니라는 마을임은,

요한복음 제11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마을의 한 집에,

마르다, 마리아의 자매 외에 나사로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의 왕복 길에 때때로 이 집에 들리셨으므로,

이 집은, 예수의 휴양소 같은 곳이었다.

 

'주여, 내 자매가 나를 혼자 일하게'

마리아는 최초부터 일하지 않고서 예수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까지 일한 후,

예수의 가르치심을 들었던 것이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것으로 염려하여 피로해졌다.

하지만 없어서 안 될 것은 하나이다'

 

'하나'라는 것은,

가르침을 듣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해석되지만,

이는 뒤로 붙인 해석이다.

예수의 말씀에 대한 후인(後人)의 감상이다.

 

예수의 단편언어(a word; a single word or phrase)에도

진리가 있는 까닭에,

이것을 여러 가지로 응용하여 해석할 수가 있다.

 

가르침을 듣는 일로 해석하는 것도 좋은 해석일 것이다.

이는 후인의 응용이다.

뿐더러 이렇게 해석하면,

예수께서

 

'가르침을 듣고 있기만 하면 된다. 일할 것 없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두 사람에 대한 예수의 태도의 편파, 불공평의 의심을 붙이고 싶어지게 된다.

 

많은 일을 많은 것으로 하고,

하나를 하나의 것으로,

이 두 말을 대조하여 생각하고,

없어서 안 될 것을 필요한 것으로 고치면,

잘 알 수 있다.

 

많은 것은 많은 품종(종류)이다.

여러 접시의 음식이다.

하나의 것은 일품(일종)의 음식이다.

한 접시이다.

 

아마도 마리아는 약간의 음식을 준비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예수의 발아래 왔던 것이리라.

 

그런데 마르다는 많은 음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혼자 애타하며, 혼자 일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므로 예수는 마르다에게 향하여

많은 음식을 만들려고 애쓸 것 없다.

음식은 한 접시로 충분하다고 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편이 자연적인 해석이고 옳다고 생각한다.

 

즉 이것은 일상응대의 말인 것으로,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온 보통의 말이다.

예수께서 그저 물어온 말에 자연적으로 이렇게 대답하신 것이지,

설교를 하실 작정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동시에 또 이 말씀에 의해 예수의 일상생활이 얼마나 간이했던지 알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식사는 일시에 일품(한 가지)으로 족하셨던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할 수 있는 대로

사의(the meaning of a word)대로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

 

다만 우리들이 그러한 예수의 말씀(a word)에 의해

커다란 진리를 배우는 일 있음은 절로 별 문제이다.

 

'마리아는 이미 좋은 몫()을 택했다'

 

좋은 몫()을 택했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일,

다시 말하면, 예수에게서 음식(말씀)을 받는 일이다.

 

'예수에의 음식'은 한 접시로 충분한 것이다.

이것은 가벼운(쉬운)일이다.

 

소중한 것은 '예수로부터의 음식'이다.

영의 음식이다.

진리의 대접(접시)이다.

 

이 이야기에는 두 부인의 성질이 대조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성질에 대해서는,

우리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말씀 및 태도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전기이므로, 언제나 예수가 중심이다.

어느 곳에서나 우리들은, 예수의 언행에 가장 무게를 두고 보며,

주로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한 소화(小話)에도,

만사에 대한 예수의 정신, 예수의 태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따라서 또한 우리들이 만사에 대하여 가져야 할 정신,

취해야 할 태도, 즉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예수의 정신 태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으므로 잘 생각해 볼 때 배우는 바가 많다.

 

물론 예수는,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그러한 말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마리아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대답하신 것이지만,

그러한 한 작은 일에도 진리는 절로 발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 소화라 해도,

만사에 관계하는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일 소사(小事), 일 단어(單語)에도 사람의 주의방침은 잘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전기 등에 있어서도,

오인에게 가장 흥미 있는 것은,

그 빛나는 사회적 활동이라든가 외면적 생애의 서술이 아니라,

도리어 그 일사(비사 an anecdote)라든가, 단언이라든가 등이다.

 

따라서 가정생활의 형편이라든가 친구에의 서한 등이 재미있는 것으로,

이들 기교적 가벼운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잘 소개하는 것이다.

 

예수전을 연구하는 데는,

이 마르다, 마리아의 이야기 같은 것에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복음의 4장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르다는 승벽(勝癖, unyielding)의 활동적인 부인으로서,

자기가 예수를 영접하러 나가, 주님을 맞이 하여다가 충분한 요리를

대접하려고 힘껏 일했다.

 

(38그들이 길을 가시는 때, 예수께서 어떤 마음에 들어가시니 마르다라 하는 여인, 이를 영접하여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에는 객을 충분히 기쁘게 하려는 소원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외에도, 한 번 많은 음식을 내어 자기도 칭찬 받고자하는,

'자기도 기쁘게 하려는' 사욕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칭찬 받아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편이 주였다.

타애심(他愛心) 2할에, 자애심(自愛心) 8할을 합친,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객편이 주가 아니라 자기편이 위주이다.

이는 승벽의 부인에게 흔히 있는 일로서 동서고금에 변함없다.

 

마리아는 마르다보다 단아(refined), 깊이 있는 부인이다.

그리고 예수 같은 이를 대접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자기들이 충분히 음식을 대접할 것이 아니라,

객인 분에게서 충분한 음식을 받아야 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에게서,

음식을 받고자 그 발아래 앉았던 것이다.

 

그리고 언니의 불평 호소에 대하여,

예수는 활동하는 마르다 보다도

활동 않는 마리아를 좋다하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세상에 그리스도에게 쓰이려는 열심을 가진 사람으로,

소위 활동을 귀히 여기고,

너무나 계획 수단에 호소하여,

충심(전심)으로 깊이 맛보지 않고서,

전도라든가 사업이라든가 하는 것을

유형적으로 행하는데 부심하고,

빨리 훌륭한 결과를 이룩하여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 꾀(도모)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의 상례로서,

자기를 기쁘게 하고 스스로 성공을 즐기고자하는 사욕심을 품어,

마침내 욕심의 노예가 되고,

그 때문에 고민하고, 심노하고,

가끔 일이, 예기에 어긋나면,

절망비탄에 빠지는 것이다.

언니인 마르다는 이런 유의 사람이었다.

 

또 그리스도에 쓰이는데,

활동치 않고, 계획 않고, 운동 않고, 분주 않고

자력으로써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 않고,

먼저 조용히 가르치심을 듣고,

이를 맛보고, 이에 의해 능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마리아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마리아의 태도를 가하다고 하셨다.

즉 이편에서 그리스도에게 그 음식을 대접하는 것 아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음식(미식)을 받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대 정신은,

행함을 존중하지 않고 신앙을 존중하는 점에 있다.

 

특히 이것을 세설(細說)하는 것은 로마서이다.

행함에 그치고 있는 동안은 번민을 면치 못한다.

()까지 오지 못하고서는 기쁨은 얻지 못한다.

도덕은 제2의의 일이고 신앙은 제1의의 것이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가하다 하신 것은,

사물의 근원을 존중하신 것이다.

 

요한은 주의 사랑하는 제자(요한복음 13:23)였던 것은,

원기 발랄한 활동가인 베드로보다도,

고요히 도(말씀)를 듣기를

주리고 목마른 자 같이 구원을 원했던 요한 편이

주의 기뻐하시는 바로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온순한 제자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아니다.

잘 말하는 바를 듣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

 

종교를 구하는 태도에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지식적 연구적인 태도이고,

하나는 실제적 신앙적인 태도이다.

 

지식적인 종교 연구도 재미있는 것이어서,

근간 '종교 연구'라고 하여 유행하는 것은 거의 이것이다.

 

그러나 널리 재료를 모아 여러 가지 방면에서

철학적 지식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쾌락이라 해도, 단순한 지의 쾌락을 얻은 것일 뿐,

마치 미국에서 돈 모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뿐 실제 미국에는 가지 않고서,

스스로는 돈을 모으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면 안심이 얻어진다.

이렇게 하면 환희의 사람으로 된다는 것을 알 뿐으로는,

조금도 자기의 사실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아름다운 꿈을 꾼 것으로는,

공상이요, 채워지지 않은 소망이다.

 

2의 태도는 사실의 신앙을 구함인데,

원하는 바는 암중의 광명, 고난 중의 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이 요한의 태도, 마리아의 태도였다.

 

언어로서 위로 받을 뿐의 제1의 태도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능력을 구한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한 것은,

 

1의 태도를 낮추고 제2의 태도를 가로 한 것이다.

 

다수의 교회가 주는 바는 제1의 편인 ''이다.

설교이다. 여러 가지 의식이다.

형식으로 위로 받는 일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위자의 말이 아니라 위자의 열매이다.

오늘의 양식으로 고생하는 자에게는 말을 주어도 무효이다.

열매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능력을 필요로 한다.

 

마리아는 마음을 열고 예수의 발아래 앉았다.

우리도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주께 다가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마음을 열면 능력은 위에서 더 해진다.

 

마르다-(활동을 사랑하는 사람, 활동을 사랑하는 교회, 활동을 사랑하는 사회)-

이것을 모르고서, 자기의 힘으로 힘껏 활동하려고 몸부림치며 안달한다.

 

그러나 자기를 개방하여 우주에 맡기면

활동하는 우주의 일부로 되어 절로 활동을 개시하는 것이다.

 

마치 도보로 먼 곳에 달하는 것은 곤란하나,

일단 진행하고 있는 기차(train)에 내 몸을 맡기면,

자기도 절로 진행하여, 쉽게 목적지로 도달함과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의 교회는 계산을 좋아하고, 수단을 사랑하며

여러 가지 방법을 안출하여 이것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도우려 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하나님의 활동의 일부가 되어,

자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참된 신앙적 생애라고 생각한다.

참된 능력의 생애라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께 자기를 던져,

능력에 찬 일개체로 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우리들은 예수의 능력의 일부에 저촉한 것뿐이다.

그 능력 속에 투입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아버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하신다. 나도 또한 일하는 것이다'(요한복음 5:17일역)

 

''중에 자신을 넣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는 능력으로 충만 되어 있었으므로,

사람은 이에 닿는 것만으로 고침 받았던 것이다.

 

우리들도 또한,

자기의 능력에 의해 활동하지 않고서

주님의 크신 능력 안에 던져져서,

스스로 능력 있는 자로 되어,

스스로 활동체의 일부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에는 먼저

마리아의 태도,

요한의 태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115일 자책에서, 내청자필기)

 

*내촌감삼의 (191112'성서지연구')를 참조.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