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모범 2
누가복음 11장 1-4절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우리의 일용양식을 날마다 주옵소서'
옳다.
미시시피의 평원에는 밀보리가 황금물결을 치고
소와 돼지는 큰 떼를 이루어 산과 언덕을 오간다.
하지만 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 사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자를
기르기에 적합한 음식물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지금도 역시 옛날처럼
혹은 시내(2권 137역주) 산록에 아침마다 내리는 만나로서
혹은 그릿(3권 229역주) 시냇가에 까마귀가 옮겨다 주는 빵과 고기로서,
부양될 자이다(열왕기상 17장).
단지 양식의 기구는 아니다.
얻기에 어려운 거룩한 양식의 기구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 기구를 제3의 기구로서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들, 즉 신자에게 관계된 제1의 기도는,
거룩한 양식이 날마다 주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제2의 기도는,
'우리의 죄가 사함 받는 일'(4-)이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옵소서라고.
이는 제1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기원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관계된 당신의 노를 제거하시고,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내리소서 하는 의미의 기원은 아니다.
신자의 기도는 모두 하나님 본위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이름을 거룩하게 받들 수 있기를 원하는 기원으로서 시작한 기도는,
끝까지 하나님 위한 기도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옵소서란,
우리를 거룩(성결)하게 하옵소서라는 것과 한가지이다.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우리들을
성명(聖名) 성호(聖號) 위해,
또는 주의 나라 위해,
거룩한 그릇으로서 써주시옵소서 하는 것이다.
이름에 합당한 종이 되기 위해,
우리들은 우리의 죄를 사함 받고,
거룩한 자로 됨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군(聖君)은 성병(聖兵)을 필요로 한다.
죄로 부정해진 우리들은 이 몸 그대로서는
주의 나라 건설의 성업에 착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죄를 사함 받고,
우리들을 씻어 정결케 하여,
우리로 하여금 성직에 착수하게 하기 위해
그 자격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이 정신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면,
이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노하심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성인으로 되어 영원한 행복에 참여하기 위해,
사죄를 구할 때,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 것이다.
주의 나라 건설의 성업에 착수하려는 자는
먼저 제1로 하나님께 죄사함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후에 상호의 죄를 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함 받지 못할 죄와 사하지 않는 죄가 있어 가지고는,
우리들은 성군의 성병(聖兵)으로 될 수는 없다.
죄는 쓴 중하이다. 이것을 없이하지 않고서,
우리들은 앞에 놓인 경주장을 달려 갈 수가 없다.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그러므로 말한다.
'우리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들도 우리에게 (죄)진자를 사하오니'(4)라고.
죄는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부채이다.
그리고 이 부채를 면제받아,
그는 자기에 대한 남의 부채를 면제해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조 :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사하는 것과 사함 받는 것은 동시에 행해지는 것이다.
사함 받아 사하는 것이다.
사하는 마음 있어서 사함 받는 것이다.
그리고 사하고 또한 사함 받아 우리들은 자신 하나님의 성병(聖兵)으로 되고,
또 견고한 사랑의 단체로 될 수 있어서,
악마를 전장에서 구축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서로 용서치 않은 죄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유서(pardoning)의 덕이 결핍함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덕과 상대하여 종종 보기에 민망한 패배를 취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내 죄를 사함 받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나도 남의 죄를 사할 수 있을 때,
나는 이스라엘의 용자로 되어,
한 사람으로서 천인을 쫓으며,
두 사람으로 만인을 파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명기 32: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관인대도(寬仁大度)(관대)는 용자의 특성이다.
성군의 성병(聖兵)은 이 특성을 결여해서는 안 된다.
예수가 기도의 모범을 그 제자들에게 보이심에 있어서,
이 기원을 그 중에 넣으신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죄를 사함 받고 죄를 사하여,
이에 하나님의 성병(聖兵)으로 될 수 있어,
신자는 다시 자기의 약함을 느끼고,
다시 죄에 빠질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계속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넘겨주지 마옵소서'(4일역)라고.
여기 말하는 '시유'는 '시련'은 아니다.
시련은 좋은 일이다.
신앙을 연단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말한다.
'하나님,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니라'(창세기 22:1)고.
이에 반하여 (시유)는 나쁜 일(악사)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신다'(야고보서 1:13, 영역 참조)고.
그러므로 일본 역 따라,
'우리를 사탐에 조우하게 마옵소서'라고 읽을 때,
그 의미를 해득하기 어려워진다.
시련은 이것을 피할 것 아니다.
나아가 이에 당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시유를 보내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로 하여금 이를 만나게 하지 않기를 기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가 하면,
우리를 악마의 시유에 넘겨주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죄에 넘겨지지 않는 일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방인)을 그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맡겨두어,
서로 그 몸을 욕되게 하는 더러움에 내어주셨도다'(부치셨도다)(로마서 1:24일역)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죄에 내어주시는 것은,
몸소 내어 주신다는 것은 아니다.
은혜의 손을 떼어,
사람이 그를 버리고 떠나는 것을 막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인을 시유에 내어주지 마옵소서 하는 것은,
은혜의 손을 놓지 마소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윗의 참회의 노래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편 51:11 한글개역)
라고 있음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떠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악마와의 사이에 서서 중립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날 것인가, 악마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끌릴 것인가, 악마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듯 약한 것이다.
그는 일단 죄를 사함 받아 신자로 될 수 있다 해도,
또 다시 죄를 되풀이하여 본래의 그로 돌아가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우리를 시유에 내주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위험은 영구히 그치지 않는다면 매우 불안하지만,
그러나 이 위험을 자각하여 그 기도를 계속할 때,
영구히 이 위험에서 면제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시며,
우리들은 그의 자녀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절대로 그에게서 독립하여
그의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 때란 없는 것이다.
이는 불행처럼 보이지만 불행은 아니다.
아니, 커다란 행복이다.
그것은 그래야만 하나님과 우리와의 부자의 관계가 영구히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여'로 부르기 시작한 기도는,
언제까지나 오인을 떠나지 마옵소서 라는 기원으로서 끝난다.
모범적 기도의 제목은 모두 5개조,
앞에 2개조는 하나님에 대한 기원,
뒤의 3개조는 하나님의 자녀 전체에 대한 기원,
그리고 일언(一言)도 자기의 행복안전에 대하여 말한 바 없다.
성명(聖名)을 거룩히 받들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여,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심겨지기를 원하고,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여,
그렇게 심겨진 참된 지식이 사실로 되어 나타나기를 원한다.
그리고 신자 전체 위해 기도함에 있어서도,
그들 자신의 이익 위해 기도하는 일없이,
이름이 드높여지기 위해, 나라가 임하기 위해,
그들이 사역되는 것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적당한 능력과 자격이 주어지기를 기도한다.
즉 성자를 기르기에 족한 거룩한 양식을 날마다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즉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서로의 죄를 사할 수 있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성명 선양(enhancement),
나라 건설의 성직에 감당할 수 있는 자로 되게 하옵소서라고.
즉,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알기에,
우리를 영구히 주의 손안에 두어,
악마의 시유에 내주지 마옵소서라고.
사욕의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한 기도이다.
하나님을 먼저하고 사람을 뒤로하는 기도이다.
자기 일개인의 일에 생각 미치지 않는 기도이다.
하나님과 우주에 전심을 다한 기도이다.
실로 모범적 기도이다.
예수의 제자는 그러한 기도를 날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요한복음 2:17일역)는
저력의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에게,
성부는 그들이 구하지 않는 것까지를 모두 주시는 분이시다.
즉 가택(주거 a dwelling), 형제자매,
어머니, 자식, 전답, 박해와 함께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또 후 세상에 있어서는 한없는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마가복음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내촌감삼의 (1915년 3월 '성서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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