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편의 두 강도
성 경: [눅 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 예수의 좌우에서 못 박힌 두 죄수 중 한명이
예수를 비방하고 있는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죄수는 유대인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로 모욕하고 있다.
두 죄수에 대한 누가의 언급은 이미 32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시(注視)될 필요가 있다.
(32절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엘리스(Ellis)는 두 죄인의 이야기가
예수의 처형 이야기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마태와 마가는 두 죄인이 같이 예수를 욕했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만다.
(마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막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범죄자가 예수를 비방했다는 사실이
예수께서 당하신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 주고 있는데,
이 범죄자가 왜 비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사형을 당할 정도의 죄인이라면 셀롯당(Zealot)에 속한
무력 독립투쟁가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죄인은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혁명적 변혁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에서 욕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ngstorf).
그러나 41절에서 다른 한 명의 죄수가 정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들 두 명의 죄수는 독립투쟁가는 아니었을 듯하다.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 예수를 가운데 두고 두 죄인의 논쟁 속에서
예수의 본성이 규명된다.
예수를 비방하는 죄인을 향해 반박한 본 구절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죄수는 여호와 신앙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기서는 징벌에 대한 공포의 차원에서 언급되었으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경외심을 지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가 동일한 죄를 졌다는 말로 역이해 될 수 있으나 41절의 내용으로 보아
로마총독으로 부터 받은 재판정의 판결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눅 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 예수의 의로움에 대해 말하기 전,
이 죄인은 자신들의 형벌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문맥상 예수에 대한 언급을 대비적으로 강조한다.
이 죄인은 예수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하다.
왜냐하면 자신 있게 예수의 언행(言行)에 있어서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확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예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Bormhauser, E. Lahse),
여기서의 초점은 죄인의 회개에 있지 않고
죄인에 의해서 예수의 의로움이 증언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예수의 처형은 잘못된 것으로서 대적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이다.
또한 누가는 '아토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옳지 않은', '본래 제 자리가 아닌'(out of place)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처형대는 예수가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눅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이 죄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같이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Messiah)를 기다렸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러한 기대가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영존할 어떤 것으로서의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나라에'라는 표현 중에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엔'은
' ∽ 안으로'(into) 혹은 ' ∽와 관련하여'란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이 죄수는 예수 안에서 신적인 메시야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초월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았던 것이다.
'밈네스코'는 '좋은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서 너그럽게 보아 주기를 요청하는 말이다.
매우 겸허하고 소박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같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왕권적 권위도 강조하지만 죄인의 믿음이 빛나듯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통찰이야말로 43절에서 언급되는 예수의 약속의 근거가 되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樂園)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선언한다.
여기서 언급된 '낙원'(파라데이소스)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인데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사 51:3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I. H. Marshall).
(사 51:3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그러나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사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는 중간적인 장소로 이해되기도 한다(J. Jeremias).
참고로 신약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16:22-31과 고후 12;1-4은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16:22-31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고후 12;1-4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리고 계 2:7의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은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 연관된다고 생각된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한편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
* 참고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4: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