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31일 목요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좌우편의 두 강도

 

성 경: [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 예수의 좌우에서 못 박힌 두 죄수 중 한명이

예수를 비방하고 있는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죄수는 유대인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로 모욕하고 있다.

 

두 죄수에 대한 누가의 언급은 이미 32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시(注視)될 필요가 있다.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엘리스(Ellis)는 두 죄인의 이야기가

예수의 처형 이야기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마태와 마가는 두 죄인이 같이 예수를 욕했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만다.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범죄자가 예수를 비방했다는 사실이

예수께서 당하신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 주고 있는데,

이 범죄자가 왜 비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사형을 당할 정도의 죄인이라면 셀롯당(Zealot)에 속한

무력 독립투쟁가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죄인은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혁명적 변혁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에서 욕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ngstorf).

 

그러나 41절에서 다른 한 명의 죄수가 정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들 두 명의 죄수는 독립투쟁가는 아니었을 듯하다.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 예수를 가운데 두고 두 죄인의 논쟁 속에서

예수의 본성이 규명된다.

 

예수를 비방하는 죄인을 향해 반박한 본 구절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죄수는 여호와 신앙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기서는 징벌에 대한 공포의 차원에서 언급되었으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경외심을 지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가 동일한 죄를 졌다는 말로 역이해 될 수 있으나 41절의 내용으로 보아

로마총독으로 부터 받은 재판정의 판결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 예수의 의로움에 대해 말하기 전,

이 죄인은 자신들의 형벌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문맥상 예수에 대한 언급을 대비적으로 강조한다.

 

이 죄인은 예수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하다.

왜냐하면 자신 있게 예수의 언행(言行)에 있어서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확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예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Bormhauser, E. Lahse),

 

여기서의 초점은 죄인의 회개에 있지 않고

죄인에 의해서 예수의 의로움이 증언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예수의 처형은 잘못된 것으로서 대적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이다.

 

또한 누가는 '아토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옳지 않은', '본래 제 자리가 아닌'(out of place)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처형대는 예수가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이 죄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같이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Messiah)를 기다렸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러한 기대가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영존할 어떤 것으로서의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나라에'라는 표현 중에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

' 안으로'(into) 혹은 ' 와 관련하여'란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이 죄수는 예수 안에서 신적인 메시야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초월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았던 것이다.

 

'밈네스코''좋은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서 너그럽게 보아 주기를 요청하는 말이다.

매우 겸허하고 소박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같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왕권적 권위도 강조하지만 죄인의 믿음이 빛나듯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통찰이야말로 43절에서 언급되는 예수의 약속의 근거가 되었다.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樂園)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선언한다.

 

여기서 언급된 '낙원'(파라데이소스)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인데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사 51:3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I. H. Marshall).

 

(51:3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그러나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사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는 중간적인 장소로 이해되기도 한다(J. Jeremias).

 

참고로 신약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16:22-31과 고후 12;1-4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16:22-31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고후 12;1-4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리고 계 2:7'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 연관된다고 생각된다.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한편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

 

* 참고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4: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2022년 3월 30일 수요일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십자가의 처형 2

 

(23:32-43) 또 다른 두 범죄자도 죽게 되어 그분과 함께 끌려가니라.

33) 그들이 갈보리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범죄자들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있더라.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

35) 백성은 서서 지켜보는데 치리자들도 그들과 함께 그분을 비웃으며 이르되,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곧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라, 하더라.

36) 또 군사들도 그분을 조롱하면서 그분께 나아와 식초를 바치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들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분 위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이라 쓴 글도 있더라.

39)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

42)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4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KJV 한글)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독교를 헐뜯는 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헐뜯게 된다.

알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 그 이유이다.

 

[2] 부분적으로나마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성질의 무지(無知)가 있다.

 

교육을 못 받았거나 부주의한 성격으로 지식을 얻을 기회나 교훈을

받아들일 능력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무지가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를 못 박은 자들이 지배자들로 인해 무지 속에 갇혀

예수에 대해선 나쁜 선입관이 박혀 있고 그것이 더욱 확산되어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거역하여 행하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런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 기도는 얼마 가지 않아 응답받았다.

그를 죽이는데 손을 잡았던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로 상당수 회개하였던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위한 모본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첫째,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자녀가 아버지께 하듯 우리는 경외심과 신뢰로써 그에게 나가야 한다.

 

둘째,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남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할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 사하심이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적들"과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며 우리 자신에게 하듯 그들의 범죄를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다시 말해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니).

 

또한 우리는 그들의 죄, 우리를 대적하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만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명령의 본을 보여 주셨다.

 

(5:44-45,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이로써 그 명령을 준행하게 밀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원수들을 사랑하고 위해 기도하셨으니

우리가 어떤 원수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2.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회개.

 

이것은 세상의 권세자들과 관리들이 그리스도를 정복하였다고 여기는

그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정복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두 강도 사이에 달리셨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특이한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그 영향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미치게 되었으며

그들에겐 복음의 전도를 통하여 그 영향에 "더욱 가까이"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행악자였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생명을 더하는 생기"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죽음을 더하는" 것이 된다.

멸망할 사람들에겐 어리석음이 되지만

구원받을 자들에겐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1) 그곳엔 "끝까지 고집을 부린" 행악자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곁에 있으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비방하였다".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네가 저들이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 역시 고통과 고뇌 속에서 죽음의 그늘에 가리운 골짜기를 헤매면서도

교만한 마음은 꺾이지 않고 자기와 함께 고난 받고 있는 동료에게 조차도

부드러운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바보를 몰타르 속에 넣고 짓밟더라도 우둔함은 걸러낼 수 없다".

 

그들이 스스로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엔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누구나 당연히 "억제해야" 된다고 생각되는 망발을 "유발시키곤" 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그 자신과 그들을 구원하라"고 대들고 있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그리스도를 비방하려는 건방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를 통해 구원 얻을까 기대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가 만약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면

그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 점을 유의하자.

 

(2) "마지막 순간에 가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자도 있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강도들이 그와 함께 못 박혔으면서도 그를 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그들 중 "한 강도"에게만 적용되는 사실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또 다른 주석가들은 처음엔 그들 모두가 그를 "욕했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은 마음이 변하여 갑자기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으로 풀이한다.

 

사탄의 손아귀 안에 떨어질 찰라에 있던 이 행악자는

불 속에서 타는 나뭇등걸을 건져내듯 하늘의 자비와 은총의 힘으로 구함을 얻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탄은 먹이를 잃은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임종의 순간까지 회개를 연기하거나

그때에 가서도 자비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자들에겐 구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아무리 늦더라도 상관할 바 아니지만

늦게 하는 회개치고 진정한 회개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회개할 시간은 있겠지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강도의 예처럼 자기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강도의 예는 전혀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에는 그리스도의 자비나 은총의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였다.

그는 단지 그가 "연약하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권능의 한 예를 보이기 위하여 마련된 섭리의 한 부분이었다.

 

유다를 파멸시키고 베드로를 건지심으로 사탄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자신이 할 마음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표시로서

이 행악자를 회개시킴으로 다시 사탄을 정복하여 승리의 트로피를 세우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면 이 사건이 예외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1] 그에게 내린 하나님의 예외적인 은총의 역사. 이것은 그가 한 말에서 볼 수 있다.

 

[2] 이와 같이 짧은 시간 안에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그에게 내려진 은총의 변화를 여기에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그가 다른 행악자에게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40-41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a. 그는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자기 동료를 꾸짖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신앙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치라고 비난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데 다른 무리와 함께

휩쓸려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임을 이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이 두렵다. 그래서 감히 그렇게는 못하겠다. 너도 그래야 되지 않겠니?"

 

그들의 눈을 뜨게 한 이 모든 일들을 통해 그들은

생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 악하디 악한 마음속에도

깨닫게 된 것이다.

 

"네 속에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너와 같이 수난 받는 동료에게 그처럼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이 악한 백성들이야 무슨 짓을 하든 너 역시 죽어 가는 사람이므로 너조차 죽어 가는 사람을 학대하는 것은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b. 그는 자신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고백을 한다.

 

"우리는 이에 당연하거니와" 그들은 모두 같은 한 가지 죄목으로

고난을 받고 있었음으로 그는 자신 있게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라고

덧붙여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남달리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게 된다.

 

이 둘은 죄악과 고통으로는 동료였으나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은 "파멸을 당하였다".

 

이제까지는 모든 행동을 함께 해왔던 둘이었지만

이후로는 "한 사람은 택함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되었다".

 

그는 "너는 당연하거니와"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 당연하거니와"라고 말한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자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에 대해선 무엇이든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유의하자.

 

하나님께선 "정당하게 행하시나" 우리는 "악하게 행하였다".

 

c. 그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믿었다.

 

비록 그가 두 군데 법정에서 정죄를 받고 가장 악한 범죄자처럼 취급당하였으나

이 회심한 강도는 그가 고통 중에 하는 행위를 보고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 Ouvde.n a;topon - 즉 그릇되거나

그의 성품에 흠이 되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대제사장들은 그를 행악자들 "가운데" 못 박게 하여

마치 그를 "그들과 같은 무리"로 여기게 하였다.

그러나 이 강도는 그들보다는 그래도 양심이 있어

그는 "그들과 같은 자"가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가 전에 그리스도나 그의 놀라운 행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가의

여부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은혜의 성령께서 이 사실을 그에게 깨우쳐 주어

그는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둘째, 그가 우리 주 예수께 한 말을 보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42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것은 "죽어가는 죄인이 죽어가는 구세주"에게 드린 기도였다.

이처럼 십자가 위에서 비난받고 조롱당하면서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듣게 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광이었다.

 

"이처럼 기도"하게 된 것은 강도로서는 행운이었다.

아마 전에는 한 번도 기도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게 되었다.

 

생명이 있는 한에서 희망은 있는 것이며

희망이 있는 한에서 기도할 여유도 생기는 것이다.

 

a. 이 기도를 통하여 그의 믿음을 살펴보자.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였으며" 이 회개를 통하여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였으며,

주님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주인이며

지금 그 나라로 들어가고 계시며 그분만이 이 나라의 통치권을 소유하실 분으로서

그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이 있는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임을 고백하였다.

 

그리스도는 지금 치욕의 늪에서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같은 백성으로부터 모욕을 당하며

자기의 아버지도 구하지 못하는 위선자라는 조롱당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영광스럽게 하고 백부장들을 경악하게 만든

신기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이와 같은 고백을 하였다.

 

"진실로 우리는 이스라엘에서조차 그와 같은 믿음을 찾아보지 못하였다".

 

그는 이 생명이 끝난 후 있을 다른 생활을 믿었고 그 생활에서 행복해지길 바랐으며

다른 강도와 같이 "십자가에서 구원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모든 고통이 끝난 후 참된 복을 얻게 되기를 바랐다.

 

b. 이와 같은 기도에 나타난 그의 겸손을 살펴보자.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한 것이 그가 요구한 모든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쓴잔을 함께 마시며 그의 오른손이나 왼손으로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얻지 못한 영광을 얻고 있었음에도

그는 "나를 먼저 택하소서" 하지 않았다.

 

당시 제자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갔지만

그는 오히려 제자들이 그의 나라에서 좌편에 혹은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것과 같은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고난 중에 인정받는 것은 때로 이와 같은 유익을 얻게 해 준다.

 

(52:31-32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

32) 그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그의 자리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자리보다 높이고).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가 구한 것은 다만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였다.

어떤 식으로 기억하든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겼다.

이는 마치 "요셉이 관원에게" "나를 생각하소서"하고 부탁한 것과 같은 것으로

 

(40: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이렇게 한 것이 오히려 더 빠른 효과를 얻게 되었다.

관원은 "요셉을 잊었으나" 그리스도는 이 강도를 기억하셨다.

 

c. 이 기도 속엔 끈질긴 요구와 열의가 담겨져 있다.

 

그는 당연히 이 기도 속에 자신의 온 영혼을 쏟았다.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면 족하겠나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나를 당신의 손으로 거두소서."

 

지금은 그의 나라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기억됨이야말로

우리가 마땅히 구하고 기도해야 할 것임을 명심하자.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복된 삶과 죽음을 지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나라에 계시면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계신다.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 그리고 나를 위하여 간구하소서".

 

그는 그곳에서 통치하고 계신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당신의 성령으로 나를 통치하소서".

 

그는 그곳에서 그에게 속한 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계신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소서.

죽음의 때에 나를 기억하시고 부활의 때에도 나를 기억하소서

 

* 참조 (14:13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3] 강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외적인 자비.

 

그의 기도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아멘인 내가 진실된 증인이 된 내가 네 기도에 아멘하여 그 기도를 인정하리니, 오히려 네가 요구한 것 이상으로 네게 허락하리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첫째, 이 말씀의 대상에 대하여.

 

이 말씀은 회개한 강도에게 한 것이지 그의 친구에겐 해당 없는 말씀이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은 그리스도와 같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심판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저주와 함께 떠나갔지만

다른 한 사람은 축복을 얻게 되었다.

 

비록 자신도 극심한 고통 중 다른 한 사람은 축복을 얻게 되었다.

비록 자신도 극심한 고통 중에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불쌍한 죄인을 위하여

위로의 말씀을 하여 주셨다.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진실로 회개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낙원에 있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은 사실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높이며

반역자와 행악자들이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이처럼 택함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 이 말씀을 "한 분"은 누구인가?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또 다른 중보의 말씀으로써

특별한 경우에 하신 말씀이지만 한편으로 그의 수난의

근본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내용이 깃들어 있다.

즉 그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용서"의 값을 치루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나아가서 우리를 위하여 "영생"을 사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의 문을 회개하고 순종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열어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a.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가 지금

"하데스 -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의 인간 영혼은 육을 떠난 영혼들이 머무는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저주받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축복받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

즉 낙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완성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기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낙원으로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앞에 놓여진 기쁨의 시작이며

이것으로 인하여 그는 스스로 위로를 얻게 되었다.

 

그는 십자가를 짐으로 면류관을 얻게 되었으므로,

우리 역시 고통을 겪지 않고 다른 방도로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될 것이다.

 

b. 그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믿게 된 모든 이들은 죽은 후에

그와 함께 그곳에 있게 될 것을 믿게 되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이처럼 복된 은혜를 값 주고 사셨으며

왕으로서 그들에게 필요한 때엔 언제든 그 은총을 내리도록 마련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이 우리 앞에 제공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a) 그곳은 "낙원"이다.

 

에덴동산에 비유되는 "하나님의 낙원, 기쁨의 동산이다.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우리의 최초 조상은 죄를 짓기 전에 그 에덴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두 번째 아담을 인하여 우리는 첫 번째 아담으로 인하여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세상적인 기쁨이 아닌 하늘의 낙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b) 그곳에선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

 

그리스도를 뵙고, 그리스도와 함께 앉으며,

그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하늘나라에서 얻을 행복이다.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c) 그것은 죽음 직후에 얻게 된다.

 

오늘 밤, 내일이 오기 전,

"오늘 너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신앙이 깊었던 자들의 영혼은 육체의 짐을 벗은 후에

즉시 기쁨과 행복 안에 거하게 된다".

의로운 자들의 정신은 즉시 "완전하게 된다".

 

나사로도 세상을 떠나자마자 "위로"를 받았다.

바울도 떠나자마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되었다.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메튜헨리의 주석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