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4일 월요일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의 부인

 

성 경: [22:54-62]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22: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 이 구절은 예수를 체포한 주동 세력이

대제사장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다.

 

(26: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그는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A.D. 18, Valerius Gratus)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비텔리우스 총독(A.D. 36)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18년간 대제사장으로 봉직했다.

 

그리고 그의 장인인 안나스 역시 대제사장을 역임했었다.

안나스는 A.D. 15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여기던 유대인들에게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추앙 받았고 가야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안나스는 명예 대제사장으로서

그 일가 중에서 세력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고 있어

현재 대제사장직으로 있는 자기의 사위 가야바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굉장한 세력을 계속 갖고 있었다.

 

이처럼 유대 전통에 따라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맡고 있으면서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들은 예수를 죽이는데 함께 공모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누가의 표현에 의하면 체포와 연행의 순간에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 모두가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음을 묘사한다.

톡히 마가는 한 젊은이가 알몸으로 도망쳤다는 표현을 통해

상황의 급박성과 제자들의 도망침을 구체적으로 강조한다.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14:51-52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 누가는 베드로의 행동에로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어간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체포하여 연행(連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대제사장의 집까지 그 뒤를 따라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다른 제자들처럼 역시 베드로도 도망하였다가

멀리서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 집의 뜰까지 들어간 것으로 묘사하여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을 노출시킨다.

 

 

[22: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한 여종 -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한 일행이었음을 알아보았던 사람은 어린 여종이었다.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이 여종은 대제사장의 종이었고,

 

(14: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요한은 문지키는 여종이었다고 언급한다.

 

(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한 여종'이라는 표현은 당시에 어린아이와 여성들은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다는 점에서

제자들 중에서 수석 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와 대비되어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강조한다.

 

그런데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와 마가의 보도와는 순서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마당에 들어와 불을 쬔 후

곧이어 공회의 심문이 있고 희롱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이 소개된 다음

베드로의 부인하는 장면을 소개하는데,

 

누가는 곧바로 대제사장의 집에서 베드로가 부인을 한 후

사람들로부터 예수가 희롱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공회의 심문(審問)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야기의 전개상 누가의 방식이 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신분이 발각된 때가 예수의 심문과 희롱이 있은 후보다는

뜰 가운데 불 쬐는 하인들 속에 들어갔을 때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주목하여 이르되 - 어린 여종이 다른 곳에서 불 쬐는 베드로에게로

가까이 왔는지 아니면 본래 베드로가 들어가기 전부터

불을 쬐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후자가 적절하다고 본다.

 

이 여종은 베드로가 불을 향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종은 베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말을 하는데 주위에 있는 하인들을 향해 하고 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 어린 여종은 베드로를 지시하면서

그리고 눈을 베드로를 향해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와 함께' 있었다고 폭로하고 있는데, 여기서 대명사 ''(아우토)는 예수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누가복음과는 달리

베드로에게 직접 ''라는 2인칭을 사용하여 심문하듯이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함께 있었다'는 말은 체포 현장에 있었다는 뜻보다는

그 이전의 활동 현장에서 목격하였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22: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베드로가 부인하여 - 베드로는 여자 하인이 폭로한 사실에 대하여 부정하며

어린 여종이 ''라고 지칭한 예수를 '그를'(아우톤)이라는

같은 인칭 대명사를 받아 답하고 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부정한 내용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는데,

본 구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정면으로 부인한 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어린 여종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묘사하여

베드로가 거짓말을 매우 능청스럽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22: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두 번째 베드로의 정체를 폭로한 사람을 언급하는 이 구절은

공관 복음서 전체가 서로 다르게 보도하고 있다.

 

첫째,

누가는 베드로가 처음 부인을 한 후 조금의 시간이 흘렀음을 언급하는 반면

마태는 베드로가 앞문까지 나갔다고 말하며 마가는 앞뜰로 나갔다고 언급한다.

 

둘째,

폭로자에 대한 언급인데 누가는 '다른 사람'이라고 불특정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반면

마태는 '다른 여종'이라고 하여 처음 폭로한 자와 구분하고 있으며

마가는 단순히 '여종'이라고만 하여 첫 번째 폭로자와 구분되는지

아니면 다른 비자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누가에 의하면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장소의 이동 없이 한 곳에 머물러 있다.

 

반대로 마태와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베드로가 첫 번째 공격을 받고

그 공격을 피하여 장소를 옮겨간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너도 그 당이라 첫 번째 여종과는 달리 두 번째 사람은 베드로를 향해

2인칭 ''()라는 말로 직접 심문하듯 폭로하고 있다.

 

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처음의 누가처럼

'이 사람'이라는 말로 베드로를 지시하고 있다.

 

또한 베드로를 가리켜 '그 당이라'(여스 아우톤)고 공격하는데

그 뜻은 어디에 '속한' 파당적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은 단순하게 부정만 하고 있는데,

마태는 베드로가 맹세하여 부정하며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며

극구 부인을 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22: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한 시간쯤 있다가 두 번째 베드로의 부인이 있은 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부인이 너무 완강했으므로 더 이상 사람들이

증거없이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사람이 - 누가는 세 번째 폭로자를 두 번째와 다른 또 한 사람임을

밝히고 있는 반면

마태와 마가는 곁에 있던 사람들이라고 복수형으로 언급하고 있다.

 

(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14: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요한복음은 베드로의 부인을 언급하면서 베드로의 정체를 폭로 한 자가

예수 체포 당시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렸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친척임을 밝히고 있다.

 

(18: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말고의 친척은 자신이 예수를 체포하는 현장에서 베드로를 목격했다고 폭로한다.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세 번째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임을 내세워 매우 구체적 증거와 함께

강경하게, 그리고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다.

 

'장담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이스퀴리제토'라는 말은

'확실하게 주장한다'. '자신있게 주장한다'의 뜻을 갖고 있다.

 

특히 마태는 베드로의 말소리가 예수와 한 통속임을 증명한다고 증거를 대고 있는데

아마도 누가와 마가가 공통되게 예시하는 증거인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임을 증명하는 기준인 듯하다.

즉 베드로는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2: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은

마태가 언급한 첫 번째 베드로의 부인(否認)과 비슷하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는 세 번째 부인하면서

예수를 저주하고 맹세하여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다.

 

여기서도 드러나는 사실은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거칠게 표현함으로써

베드로의 배신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반면

누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가능한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닭이 곧 울더라 - 이 구절은 이야기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고 있다.

 

첫째는, 예수의 예언이(34) 적중되어 완성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베드로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극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공관복음서 모두 세 번의 부인을 닭이 울음으로써 끝마치는데

마가만 닭이 두 번 울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막 14:30에서 예수가 언급한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는 예언과 일치되고 있다.

 

(14: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 예수가 돌아서 베드로를 응시한다는 이 구절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자료이다.

 

여기서 '보다'(에네 블려센)'뚫어지게 바라보다'는 뜻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을 담아 응시하는 모습을 말한다.

 

예수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이 베드로의 변절에 대해

예언했던 사실을 기억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닭 우는 소리와 함께 베드로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예수가 보낸 그 눈길은 베드로에 대한 질책의 눈길보다는(Schneider)

베드로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찬 눈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

 

예수의 눈길과 마주친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와 함께 예수가 했던 말씀이 생각났는데

그 말씀은 34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예고이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을 생각했다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예수의 눈길과 마주친 사실을 부각하는데,

아마도 누가는 베드로의 참회가

예수와의 인격적 교감에 영향 받았음을 암시하려는 듯하다.

 

이 같은 추측은

누가가 베드로의 변절보다는 참회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초기 기독교의 박해 가운데서

변절자에 대한 정죄보다는 참회의 회개를 통한 새사람 됨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이해될 수 있다.

 

 

[22: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14:72과 그대로 일치하는 이 구절은

베드로의 변절에 관한 이야기의 마무리로서 극적인 감동을 주고 있다.

 

베드로가 문밖으로 나와 '통곡했다'는 표현은

참회에 대한 더 이상 할 수 없는 극적이 표현으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 회개임을 말하고 있다.

 

'밖으로 나갔다'는 베드로의 행동은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배신했던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며

변절의 과거 모습과 단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변절자로서 불신앙 속에 있는 사람에게 베드로처럼

배신의 자리를 떠나 눈물로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누가는 전하려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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