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심문
성 경: [눅 23:1-7]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눅 23: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 산헤드린 회의가
동틀 때 시작되었으며 공회 결정 후에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데려왔기 때문에
그 때는 이른 아침을 지난 오전의 어느 시각일 것으로 보인다.
빌라도는 A.D. 26-36년에 걸쳐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으로서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그 이유는 유월절을 맞이해 각 지방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끌고 간 자들에 대해 누가는 언급할 뿐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
즉 산헤드린 대표들이 끌고 간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마 27:1-2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막 15: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누가가 언급한 '무리'도 역시 문맥상 공회에 참석한 사람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또 누가는 예수를 단순히 '끌고 가다'(아고)라고 표현하는데 비해
마태와 마가는 '결박하여, 끌고 갔다'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누가가 예수께서 희롱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마가 마태와는 대조적으로 간결하게 언급한 것처럼
(22:63-65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여기서도 예수의 치욕적인 모습에 대한 묘사를 피하려는 듯한 누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눅 23: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
세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예수를 고소한 것으로 언급하는데
상황 묘사에 있어서 누가의 표현이 마태와 마가의 표현과 차이가 있다.
첫째, 누가만이 예수를 고발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즉,
(1) 민심을 현혹(眩或)하여 질서를 위협하고
(2) 로마 당국에 바치는 세금을 거부하도록 백성을 선동하며
(3) 자칭 왕이요 메시야라고 지칭하여 왕권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고발한 내용은 사회.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같은 음모는 이미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칠 때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 의해 모의된 바이다.
(20: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고발자들이 종교적 이유를 뺀 이유는 종교 문제는
유대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빌라도의 관심 밖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라도에게는 종교 문제가 호소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사회. 정치적 이유는 총독으로서 빌라도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법적인 재판이 가능하리라고 그들은 판단하여
사회. 정치적 이유만을 강조하여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직접 심문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마 27:11-12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막 15:2-3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그러나 누가는 고소자들에 의해 나열 될 죄목 중 마지막 항목인
자칭 왕이라는 말에 대해 빌라도가 예수에게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여기서 누가의 묘사가 더 합리적이고 사실적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왔으면 이유를 먼저 밝히는 것이 당연하며
마태와 마가의 경우처럼 예수를 끌고 오자마자 빌라도가 먼저
'네가 왕이냐?'고 묻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어색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는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어준 것이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꾸며진 일임을
더욱 선명히 부각(浮刻)시키고 있는 셈이다.
▶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 예수에 대한 두 번째 죄목인데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 해도 민중들이 무서워 못할 정도로
예수의 인기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첫 번째로 제시한 죄목인 민심 교란죄는 해당될 수 있으나
(19:42-21:38의 내용은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예수가 성전을 장악하여 혁신적인 가르침을 행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20:25에서 예수는 분명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로 대답하여
대적들로 하여금 책잡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눅 23: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빌라도는 산헤드린의 대표들로부터 고소를 접수하고
재판을 진행하면서 예수를 심문하기 위해 질문을 하고 있는데
고발자들이 제기한 세 번째 죄목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 세 가지는 공히 로마 황제 가이사에 대한 반역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세 번째 '왕이냐?'라는 문제만 확인하면 세 가지 죄목에 대한 판결도
자연히 내려질 수 있는 것이다.
▶ 네 말이 옳도다 - 원문상으로 이 대답은 긍정인지 부정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쉬 레게이스'를 마샬(I.H.Marshall)은
'그 말은 네 말이다'라고 번역하며
KJV는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옮겼다(Thou sayest it, KJV).
직역하면 '네가 말한다'인데, 네가 생각하는 대로 판단하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을
가볍게 지나쳐 버리면서 무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예수는 산헤드린의 체포와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의 공정성(公正性)
내지는 합법성을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생각하는 왕이라는 개념과
그들이 왕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염연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논쟁을 피하려고 질문과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한 듯하다.
실로 예수는 온 우주와 만물 그리고 하늘에 속한 모든 권세를 소유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셨으나
(계 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예수를 고소한 자들이 말하는 왕권이란 현세적 정치적 의미에만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22:67, 68에서 언급한 바처럼
대화가 될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하여 대답을 회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2:67-68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아무튼 이 말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라
질문자의 판단으로 이해하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눅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 빌라도의 무죄 판결을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가 반역을 도모한 흉악한 범죄자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즉 예수가 군대를 조직하거나 무력적(武力的) 힘을 갖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증거나 조짐을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의 처신이 우유부단했다는 사실을 한층 더 뚜렷이 부각시킨다. 즉 무죄함을 알고도 대제사장들의 눈치를 보면서
소극적으로 석방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묘사하였다.
(마 27:13-18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막 15:4-10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마태는 독특하게 빌라도의 판결에 그의 아내가 개입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아내가 꿈에서 이 재판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재판에 개입하지 않도록 종용했다고 소개한다.
따라서 마태는 빌라도의 무죄 판결이 합법적 공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기회주의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암시한다.
반면에 누가는 빌라도의 판결이 지니는 객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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