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2
성 경: [눅 22:19-23]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눅 22: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 유월절 식사 중 두 번째 순서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는 17절에서 포도주를 가지고 행한 의식에서 사용된 단어
'감사 기도하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테오'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축복'이라는 뜻의(마 26:26 ; 막 14:22)
헬라어 '율로게오'를 사용한다.
(마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막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이는 '찬양한다'(praise),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 축원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카리스테오'나 '율로게오'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믿음에 근거를 둔
축복이라는 점에서 두 단어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큰 빵을 '쪼갠다'는 의미의 '크라오'는
신약 성경에서 식사 때 빵을 나누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큰 빵을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나누어 준 것인지
포도주처럼 자신의 것만 떼고 나머지를 제자들에게 돌려
차례대로 먹게 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강조되는 점은 한 개의 빵 덩이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것이다.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것'(투토)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빵, 즉 유월절 식사용 무교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빵과 일치시킨 '몸'이라는 단어 '소마'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를 뜻한다(Dalman, Behm, Cranfield, Kummel, E. Schweizer).
예수는 자신의 몸 전체를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온 인류의 희생물로 드리고자 하셨음이 분명하다.
요 6:51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을 언급하면서
'소마' 대신 '사릍스' 곧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살과 피를 통해
죽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사실과 연관을 갖는다.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빵 한 개를 여러 사람에게 나눈 것은
자기의 몸, 곧 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상징적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예수 자신이 여러 사람을 위해 희생됨과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먹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그 빵 즉 예수의 살을 먹는 모든 사람은
예수의 희생, 즉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 빵이 먹는 사람의 살이 된다는 의미에서 빵과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듯이
예수의 살 곧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와 하나가 되어
예수와 일치된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 나를 기념하라 -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셨으며
이를 그대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따라서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의 전체적인 삶을 기억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떼는 데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처럼
예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찬식의 목적은 그와 같은 기억을 되살려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교에 있으며,
기독교인은 예수의 일을 기억하여 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갖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만찬 도중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시고 자신의 재림시까지 이를 기념토록 명하신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지키고 있는 성만찬 예식의 기원이 된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단순한 애찬식 정도의 감사의 예전으로 지켜져 왔으나,
중세를 거치면서 교리적이며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어
성만찬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적 신학적 차이로 인해 카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주장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로서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순간 그것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예수께서 성찬식에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카톨릭측의 화체설은 너무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성찬식 때마다 떡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에 너무 큰 의미를 두어 그 의미를 와전시킨 것이다.
성만찬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 여기 언급된 잔은
유월절 식사 중 마시게 되는 4잔 중 식사 후에 분배되는 마지막 잔으로 보인다.
잔은 단순한 그릇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잔 속에 담겨진 포도주를 가리킨다.
이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이 된다는 묘사는 출 24:8과 비슷한 내용이다.
(출 24: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누가는 여기서 '새로운'(카이노스)이라는 표현으로
모세의 계약과 예수께서 세우시는 언약을 구분시키고 있다.
즉 더 이상 짐승의 피로 하나님과의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구원이 약속되는 새 계약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는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예수의 희생과 구원의 능력을 기념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것이 성찬 예식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 성찬예식은 예수의 말씀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보여 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기념하고 체험케 하는 것이다.
▶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 '붓다'는 '피를 쏟는다'는 뜻과
'술을 붓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붓는다'라는 말은 예수의 죽음을 나타내는
피 흘림과 그 죄를 상징하는 포도주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눅 22: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 그러나 보라 - 예수는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암시하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대립되는 문장으로 연결하기 위해
'그러나'(플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앞 구절에서 언급한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로 세운 계약이
지금부터 언급되는 배반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즉 구원의 약속은 배반자를 제외시킨다는 말이다.
배반자에 대한 예고를 강조하기 의해 '보라'(이두)라는 누가만의 강조법을 사용한다.
▶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 배반자가 제자들 중에 있을 것이라는
이 같은 누가의 암시는 마태와 마가의 진술과 차이를 보여 준다.
이 같은 배신의 예고가 마태와 마가에서는
식사 시작 또는 식사 중에 나타난 것으로 묘사된 반면
누가는 식사를 마친 후에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 26: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막 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그런데 요 13:26에서는 빵을 한 조각 찍어 준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식사 초반 또는 식사 중임을 암시하고 있다.
(요 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이 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누가는 이 배반의 예고를 다른 복음서들보다 비교적 짤막하고 간단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다를 직접 지목하고
마태와 마가는 제자 중의 한 명이라고 언급한다.
반면 누가는 이 같은 언급 없이 암시적으로만 묘사한 점으로 보아
제자의 배신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식사 후에 배열함으로써
성만찬 예식과 예수에 대한 유다의 배반을 구분하고자 했을 것이다.
여기서 배반자는 '나를 파는 자'(파라디도미)로 묘사되었는데
5, 6절에 이미 언급된 유다의 배신과 돈을 받기로 약속된 이야기를 전제한 것이다.
(5-6절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누가는 파는 자의 손이 함께 상 위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누구인지 불분명하게 언급하는 반면
마태와 마가는 배반자가 예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특히 마태의 경우는 그릇에 예수와 함께 손을 넣은 자가 유다임을
유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을 통해 밝힌다.
(마 26: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식탁 위에 손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손을 가리킬 수 있지만(B. Lohse)
더 확장된 의미로 볼 때 식탁은 식사를 나누는 장소이므로
친교를 나누는 가까운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Rehkopf).
이는 예수가 가까운 친구로부터 배신당할 것이라는 시 41:9의 말과 일치되는 바,
예수의 배신당함이 구약 예언의 성취로 이루어졌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시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한편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 자리에 모든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서
이 사실을 말씀하신 이유는 유다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케 하시려는 의도였다.
하나님은 항상 죄인들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므로
길이 참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인간 편에서는 다만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결단에는 선택에의 책임이 뒤따른다.
[눅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 예수는 자신을 배신하는 유다의 행위가
이미 예정된 일이었음을 앞 구절에서 암시한 후
여기서는 자신의 고난이 또한 예정된 것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임을 표명한다.
예수는 여기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고난받는 메시야의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작정된 대로 가거니'라는 말은
가장 가까운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고난이 변경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배신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 예측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견되고 있었으며 그러나 예수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운명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한대로 의연히 그 길을 갈 것이라는 굳은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누가는 앞 구절에서처럼
예수를 팔 사람을 불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마태와 마가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라고 분명하게 저주받을 사람을 지목한다.
'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아이'는 저주문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10: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막 13:17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와 같은 저주는 마 27:3-5에 보면
(마 27:3-5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가 목매어 죽음으로써 또는 행 1:18, 19절의 언급처럼
몸이 곤두박질해 배가 터져 죽음으로써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행 1:18-19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눅 22: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 예수가 특정인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 12명 중 어느 누구가 배신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언급함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혼란이 온 것을 보여준다.
12명의 제자 모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들 중에서 누가 배반할 자인지를 찾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에
논쟁적인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는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Surely not I. Rabbi?, NIV)라고
자수하는 듯한 말을 하고 곧이어 예수가 긍정함으로써
논쟁하나 장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마 26: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누가는 유다 한 사람보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 전체의 반응에 보다 큰 관심을 보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을 유다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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