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일 수요일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어린양 먹기를 바라고 또 바랐노라

  

유월절 만찬

 

(22:7-20) 그때에 반드시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야 하는 때 곧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이 이르매

8) 그분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을 예비하여 우리가 먹게 하라, 하니

9)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0)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너희가 도시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그를 따라 들어가

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께서 네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어린양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 그러면 그가 갖추어 놓은 큰 다락방을 너희에게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시매

13) 그들이 가서 보니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신 대로더라. 그들이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14) 시간이 이르매 그분께서 열두 사도와 함께 앉으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어린양 먹기를 바라고 또 바랐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것이 하나님의 왕국에서 성취될 때까지 내가 다시는 그것을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가져다가 너희 가운데서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왕국이 임할 때까지 내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9)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20) 저녁 식사 뒤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그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KJV 한글)

 

 

7일 동안 계속되는 무교절 기간 동안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수없이 선한 일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볼 때

얼마나 희망찬 앞날이 내다보이겠는가!

 

백성들은 "매일" 아침, 아침 "일찍", 그의 말씀을 들으려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 일은 여기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다른 일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일이 더 귀중한 것이니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수난의 날이

공허한 나날이 아님을 증명하는 일을 하셔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자.

 

.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준비함.

 

율법에 따라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렀다.

 

(7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그리스도는 율법으로 교육받았으며 율법이 정하는 의례를 지켰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복음의 규례를 지키며 특히 주의 만찬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지키라고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아마 그리스도는 아침에 성전으로 가르치시러 가셨고

제자들은 그 시간에 다른 길로 성내로 들어가 "유월절을 예비"하게 하신 것 같다.

자기 수하에 수행원들을 데리고 세속적인 사무에 최대한으로 쓰려는 자들은

이 일이 그들에게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영적인" 사업, 혹은 "공공"의 복리를 위해

종사하고 있다고 여겨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고용한 자들에게 어디로 갈 것인가를 지시하였다.

 

(9-10절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0)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들은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 가도록 하였다."

 

그 사람이 그들을 인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 집을 말해 줄 수도 있었다.

그 집은 아마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개의 집으로 가라, 혹은 어느 거리에 있는 그 집으로 가라,

이런 식으로 말하고 말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지시한 것은, 그들에게 섭리의 은총에 의존하여 그를 따라

"한 발짝 한 발짝" 따를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모르는 채 나갔다.

집에 도착해서 그들은 집주인에게 방을 보여 줄 것을 바랄 것이다.

 

(11절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러면 주인은 기꺼이 보여 줄 것이다.

 

(12절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그 집이 친구의 집인지 아니면 공회당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제자들은 안내자를 만났고 집으로 가서 방을 보고,

주님이 그들에게 말해 준 그대로 행하게 되었다.

 

(13절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따르는 그들은 실망할 염려가 없었다.

그들에게 내리신 지시대로 그들은 유월절 준비를 다 하였다.

 

(11절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 율법에 따라 유월절을 엄숙하게 지켰다.

 

그들이 식사할 "때가 이르매 예수는" 아마도

식탁 끝머리에 "앉으시고 열두 제자들도 그와 함께" 앉았다.

 

유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음속이 사단으로 가득 차 있고 악한 행실로 가득 한 사람도

여전히 형식적인 신앙 고백은 할 수 있으며

외형적인 헌신의 좌석에 참여할 수는 있었다.

아직 마음속에만 있고 밖으로 드러낼 만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도

그의 외식적인 특히 신앙의 외식적인 특권을 거절할 수는 없다.

 

유다는 이미 배반의 "공공연한 행위"로 죄를 지었지만,

아직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얼마나 "이 유월절을 고대하였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유월절, 주의 만찬을 고대하고 같은 소망으로 지켜야 한다.

 

(15절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가장 고대하며 기다렸노라."

 

그는 이것이 그의 고난의 서장(序章)임을 알았으며 그래서 이처럼 원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버지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처럼 그를 중개자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처럼

"앞장서서" 애써 주신 그를 섬기는 일에 우리는 주저할 수 있겠는가?

 

제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라.

 

그는 "그들과 함께" 먹기를 원하였다.

이는 그와 제자들이 다른 사람이 없는 그들만의 시간을 얻고 예루살렘에 온 이후로

이 기회 말고는 가질 수 없었던 사적(私的)인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들을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을 받기 전에 그들과 함께 먹기를 원하였다."

이 식사로 말미암아 얻은 위로로 그가 받을 고난을 즐거이 받으며

그들로 그에게 더욱 친해지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는 우리의 복음 유월절은,

고난과 시험과 죽음 자체를 위한 놀라운 준비가 됨을 명심하라.

 

2. 그리스도는 어떻게 "유월절을 폐지하셨나?"

 

이것은 형식적인 율법의 모든 의례를 삭제해 버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유월절은 그러한 의례 중 가장 "먼저" 생겼고 또한 가장 "중요한" 의례 중의 하나였다.

 

(16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또한 내 제자들도 다시는 이것을 지키지 아니하리라".

 

(1) 그것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심으로" 완성되었다.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본체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었음으로,

그와 같은 형식이나 그림자는 사라져야만 했다.

 

(2) 그것은 "주의 만찬"으로 완성되었다.

 

주의 만찬은 복음의 나라에서 행하는 성례로써 그 안에 유월절이 완성을 이루었고,

사도행전 242, 46절에 보듯이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이 자주 지켰던 것이었다.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그들은 만찬을 먹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도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성례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교제에 의한 것이다.

 

"그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였다(3:20).

 

(3) 그러나 그와 같은 자유의 축제는 영광의 나라에서나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그때엔 모든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들이 죽음과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에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을 먹으면서 하신 말씀을

유월절 포도주, 사례의 잔 혹은 감사의 잔을 드시면서 또다시 반복하신다.

 

여기에서 모인 사람들은 만찬의 주인에게 맹세를 하며 유월절 만찬을 끝맺게 되어 있다.

풍습에 따라 이 잔을 "받으사"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고,

처음 난 것들을 보호해 주심에 대해 "사례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하셨다.

 

(17절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이 말씀을 성례전의 잔을 드신 다음 하시지 않았다.

"그의 피로 세운 새 언약"으로써 더 가치와 비중을 두기 위하여

그가 손수 각자의 손에 잔을 돌려주시며 각자 영혼에 대하여

일일이 훈계하시는 것이 마땅했을 성싶으나,

폐지할 유월절 잔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말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하라.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1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성령이 강림하기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나온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때엔 너희가 주의 만찬에서 보다 영광스런 구원을 축하하리라.

 

애굽에서의 해방이나 유월절의 축하는 이 구원의 모형이며 예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날이 가까웠으니 그날이 임하기까지

너희는 더 이상 먹고 마실 필요가 없다."

 

이튿날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문이 열렸다.

그리스도께서 영적이며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복음의 만찬을 세우시기 위하여

큰 기쁨으로 모든 율법의 만찬들을(유월절 만찬도 마찬가지이다) 버리셨으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전쟁하는 교회로부터 승리하는 교회로

이동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기꺼이 영적인 양식이라도 바꾸며

영원히 만찬을 위해서는 자신의 성례전까지라도 기쁨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 주의 만찬의 구조.

 

(19-20절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유월절"이나 애굽에서의 "해방"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며 "예언적인 징조"였다.

그는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 사탄의 횡포에서 구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 단지 "살아 계신 주께서 우리를 애굽 땅에서 구해내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다 위대한 구원의 빛이 비췸으로 그들의 구원은 그 빛을 잃고 말았다.

이와 같이 주의 만찬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 "하셨다"는 사실을 기념하여 찬양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성례전을 통해 우리에게 특별히 제공된 것은 그의 죽음이다.

 

1. "떡을 떼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떼어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심을 기념하고 있다.

 

율법에서는 희생 제물을 "하나님의 식물"이라 불리고 있다.

 

(21:6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8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17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리고 그 희생 제물을 우리에게 관련지으며

그 제물의 유익과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마련된 만찬이 있다.

우리를 위해 주어진 이 떡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며 그 속죄를 확신하게 해 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더 우리 영혼을 기름지게 해 주고

만족하게 해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죄의 값으로 "떼어 주어진" 이 떡은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떼어져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은 때를 "기념하며,"

우리 자신도 영원한 계약에 그와 함께 참여하는 "그의 동료"가 되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기억하는" 행위로 삼는다.

 

이는 여호수와가 "증거"로 돌을 세운 것과 같다.

 

(24: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2. 구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심"(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이다.

17:11)은 잔에 포도주를 담아 주심으로 표현되었다.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 포도주 잔이 우리와 함께 세우신 새 계약, 새 언약의 상징이며 증거가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언약을 "기념하며" 그 언약의 약속을 "보증"하는 것이다.

모든 신도들은 그 안에서 언약의 약속에 ", 아멘" 하여야 한다.

 

술이 "마음을 기쁘게" 하듯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며 활기를 넣어 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기념하는 모든 의식을 통하여

오직 그 피는 우리를 위하여 흘리셨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필요했고, 그것을 얻었으며, 그것의 유익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

 

"나를 사랑한 자가 자신을 내게 주었도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새 언약을 대할 때엔 "그리스도의 피"를 주목해야 한다.

 

그 피로 새 언약이 생겼고 생명을 얻었으며 우리를 그 언약의 약속에 붙이셨다.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새 언약을 얻지 못했을 것이며,

새 언약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지닌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메튜헨리의 주석을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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