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3일 목요일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천국에서 큰 자

 

성 경: [22:24-30]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22: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 누가 예수의

배반자인가에 대해 논쟁한 직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다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배신자가 누구냐는 심각한 물음에 대한 해결점 없이

갑자기 자신들의 자리다툼으로 이야기가 전환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이 식사 후

곧바로 감람산으로 간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누가가 언급한 이 구절의 위치를 의심하게 된다.

 

(26: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14: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그러나 제자들 간에 자리다툼이 있었다는 암시는 9:46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고,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마가도 9:33-35 ; 10:35-41에서 두 차례 언급한 점으로 보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문제로 갈등(葛藤)

여러 번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9:33-35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10:35-41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따라서 예수의 배신에 대한 언급과 고난이 임박했다는 분위기에서

9:46과 마찬가지로 자리다툼이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또 접속사 '카이'를 사용하여 앞 구절과 연결하고 있으며

앞 구절의 '서로 묻되'(쉬제테인)라는 단어와 상응하여

'다툼'(필로네이키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래서 이 본문을 누가만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제자들 간의 갈등 묘사라고 볼 수 있으며

문장의 위치에 대한 의심도 해결이 된다.

 

'다툼'(dispute)이라는 단어는 22절의 '서로 묻되'라는 말 보다

강한 의미로서 '싸움'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따라서 이 같은 강조는 제자들이 배신자에 대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자신들의 위치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라는 소극적 논쟁에서 '내가 더 크다'라는

적극적 논쟁으로 전환함으로써 제자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회피하고

자신들의 이기적 야욕(野慾)을 드러낸 것이다.

 

 

[2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 이 구절은

20:25 ; 10:42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서로 높은 자가 되기를 바라며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정치권력의 예를 들면서 교훈을 베푸신다.

 

누가가 언급한 '이방인의 임금들'이란 국가의 공권력(公權力)을 장악한 통치자와

그 관료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방인들의 통치자들을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 상황 하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을 적대시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의 정치권력을 의미한다.

 

'주관하다'의 헬라어 '퀴리유오''주인(퀴리오스)이 된다'는 뜻으로서

주인이 노예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집권자와 민중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되어 있다는 비판적 의미의 말이다.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 여기서 말하는

'은인'(benefactor)이라는 헬라어 '유에르게테스'

'좋다'는 뜻의 '''공적 행동'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곤'이 합쳐져서 된

복합어로서 '선한 일을 위해 힘쓰는 자' 또는 '박애주의자' 등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이 같은 칭호는

이집트나(Ptolemy , Ptolemy) 시리아(Antiochus) 로마(Trajain) 등지에서

폭군적 지배자들에게 붙여졌고

유다에서도 오니아스 대사제(Onias )에게 이 칭호가 붙여졌다(I. H. Marshall).

 

이방인의 왕들은 그들의 백성 위에 군림하고 최상의 군주로 행세하는데서

그들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며 백성들로부터 칭송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 같은 칭호를 스스로 사용한다.

 

이 말 역시 폭군이 미사여구(美辭麗句)로 꾸며지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다.

 

 

[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 여기서 가리키는 '너희'는 제자들이지만

앞 구절에서 말한 '이방인들'(Gentiles)에 대칭되는 말이라는 점에서

누가는 당시 기독교인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다.

 

즉 세상의 인간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되어 있고 그 지배자의 횡포가

오히려 정당화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를 말한 것으로

25절에서 제사한 이방인들의 집권자들과 반대되는 자세이다.

 

누가는 이 말을 소개하면서 당시 초대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즉 이는 당시 교회 내에 자리의 높고 낮음에 한 문제가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큰 자'(the greatest)에 대비되는 '젊은 자'

헬라어 '호 네오 테로스'를 번역한 말인데

본래의 뜻은 '아주 어린 자'(youth)를 뜻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큰 자'와 대칭되어 아주 어리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 참된 지도자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세상의 지배 구조를 거부하고 혁명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교권적(敎權的)이고 권위주의적인 구조를 뒤엎고

모두가 서로 섬기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요청이다.

 

이 같은 요청이 인간의 모든 공동체가 바르게 유지되고 발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 섬김을 받는 자와 섬기는 자를

대비시킨 반문 형식의 이 비유는 앞 구절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큰 자가 작은 자로, 지도자가 섬기는 자로 되어야 한다는

파격적(破格的) 명제와 현실적 가치 기준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26절의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앉아서 먹는 자'는 일반적으로 유대 생활 속에서 종을 둔 주인,

또는 앞 구절에서 언급했던 지도자, 집권자들과 시중을 받으면서

음식을 먹는 손님을 뜻한다.

 

그리고 '섬기는 자'는 식사 시중을 드는 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26절에서 언급된 '젊은 자'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와같은 대비적 비유를 이야기한 후 예수는 너무도 자명한 대답인

앉아 먹는 자가 크다고 말하면서 대비적 효과를 고조시키고 있는데

곧이어 언급되는 문장을 강조하는 효과를 준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26절의 내용을 결정적으로 보증하고

확신시키는 이 말은 제자들의 다툼에 대한 훈계의 결론에 해당된다.

 

특히 예수를 배우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한 이 말은

곧 제자들에게 규범이 되고 모범이 되는 스승을 배워야 함과

아울러 그를 따라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當爲性)을 가르친다.

 

여기서 예수는 지금 자신이 제자들 속에서 섬기는 자로 있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먹는 비유를 들었다는 점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 같은 추측은 17-20절까지의 내용을 전제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행한 예수의 역할은 섬기는 자의 모습을 통해

메시야적 입장에서 제자들에게 예수 사역의 의미를

제시해 주었다는 의의가 있다(I. H. Marshall, J. Weiss).

 

그래서 바이스(J. Weiss),

예수가 시중든다는 말은 그의 전체적 삶을 통칭한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 자신은 섬김을 밭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기 때문이다.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께서는 먼저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셨을 뿐아니라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사랑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의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내어주셨다.

 

 

[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 이 구절은

마지막 작별 인사와도 같은 암시를 준다.

 

이제까지의 공생애 활동을 하는 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그들의 고생을 격려하고 계신다.

 

24절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제자들의 여러 잘못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제자들을 가리켜 자신의 모든 시험 때에 함께 하여 준

고맙고 장한 제자들로 묘사하며 제자들에 대해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예수는 제자들을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모범자들로 인정하고

앞으로 닥칠 위험들 때문에 예수와 함께 했던 그 길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갈 것을 격려 하신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이 예수와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진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시험'(페이라스모스)이란 '유혹'이라는 단순한 의미보다는

공생애 기간 동안 겪어온 수많은 '위험들' 또는 '고통''시련들'(trial)을 뜻한다.

 

 

[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한과 과업을

넘겨주기 전에 그 권한과 과업이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왔음을 밝힌다.

 

여기서 언급한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이다.

'바실레이아'는 국가의 구성 요소인 영토적인 개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통치적인 개념 즉 왕권(kingship)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영토적인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통치적인 왕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물론 이 왕건은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온 하늘나라의 통치권(統治權)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왕권을 지상에서 받았으므로

이미 하늘나라는 이 땅에서 예수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왕권을 위임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있음을 뜻하며

그 선포 내용에 대한 보증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나도 너희에게 맡겨 - 이제 하늘로부터 온 그 권한과 권위가 제자들에게로 옮겨간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도 그렇게 위임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의 위임이 하나님의 위임임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건설과

하나님 나라 선포 활동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 뒤에도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내 나라에 있어 - 25-29절이 섬기는 자의 도리를 말한 반면 본 구절은

그 역할과 사명을 다한 제자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보상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데

종말적 심판의 때에 도래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19:28절에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까지'라고 언급되는바

이는 세상이 변혁된 새 세계, 곧 종말론적(eschatological)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임을 암시한다.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 그 날에는 하늘나라에서

예수와 함께하는 잔치가 벌어진다.

 

16절에서 하늘나라에서 유월절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먹지 않겠다는

예수의 말을 생각하면 이 잔치는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해방(解放)과 구원의 유월절 축제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제자들은 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보상으로 받게 된다.

 

19:28에서는 '열 두 보좌'라고 말함으로써 분명히 제자가 모두 참여 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누가는 자리 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느 진술이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포함시킬 수 없어

슷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I.H. Marshall).

 

그러나 숫자는 중요한 의미가 없다.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을 두고 한 말이지만

보편적 의미로 이해되어야한다.

 

즉 열 두 지파는 곧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통치 구조의 변혁이다.

 

25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통치 구조는 사라지고

26절에서 언급된 형태의 통치 구조가 실현되어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형태의 통치는 종말의 때에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 섬기는 통치가 확장되어가고 선포되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도 암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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