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2일 토요일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잡히신 예수

 

성 경: [22:47-53]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22: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한 무리가 오는데 -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

예수를 체포하기 위한 일단의 무리들이 유다의 인솔로

예수께 다가오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장면을

다가오는 '무리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사람들임을 밝히면서 그들의 손에는 칼과 몽치가 들렸다고 언급한다.

 

아울러 추측컨대 이 일단의 무리들 가운데는

안토니아 요새를 수비하는 로마 병정들과

성전을 경비하는 유대 병정들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유다가 서술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누가는 유다에 대한 배신을 부각시킨다.

때문에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온다고 기록하는데,

 

누가는 '유다라 하는 자가' 온다고 경멸적 표현을 함으로써

유다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22: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 유다가 예수께 입맞추기 위해 가까이 올 때

예수께서는 유다의 심증을 꿰뚫어 보셨다.

 

덧붙여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검을 들고 따라온

병사들과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한다고 약속했음을 밝힌다.

그런데 마태와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유다는 인사와 함께 입맞춤을 하게 되고 곧이어 예수를 체포하게 된다.

 

반면 누가는 입맞춤을 시작하려 했을 뿐 성공하지 못하였다.

누가의 이 같은 표현이 시사하는 바는

예수가 유다의 속임수에 넘어가 체포된 것이 아니며

유다의 행위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점과

예수가 직접 유다의 이름을 부르는 탄식조의 어투를 통해

유다의 배신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은

깊은 밤인데다 감람나무로 인해 더욱 어둑 캄캄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한다면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가룟 유다와 체포자들은

예수를 쉽게 알아내어 체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고,

그 신호는 가룟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으로 결정되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행해야 할 입맞춤을

가룟 유다는 파렴치(破廉恥)한 배반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22: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 제자들은 유다와 그가 이끌고 온

무리들을 보고 예수의 예언대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태와 마가는 이러한 언급 없이 무리들이 예수를 잡았다고 말한다.

 

역시 누가의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의 위험을 함께 느끼며

반응을 보이게 함으로써 제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 제자들은 예수에게 38절에서 보여 주었던

칼로 적들을 향해 대항할 것을 요청한다.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본문은 질문 형태이지만 50절에서 칼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질문 속에 칼을 사용해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누가는 이같은 제자들의 행위를 의분(義憤)에 찬 긍정적 행동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22: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 칼을 사용한 사람이

18:10에 따르면 베드로였다.

그리고 요한은 종의 이름이 '말고'(Malchus, NIV)였음을 밝힌다.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이 같은 상황은 매우 긴박하고 전면적인 싸움의 단계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보여 준 행동은 용감한 행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스승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또 스승을 보호하고 위기 상황에서 구출하겠다는

기특한 마음에서 나온 의리 있는 행동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다함없는 충성이요 그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獻身)의 사랑이었다.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 칼을 내리친 결과 그 종은 오른쪽 귀가 떨어졌다.

 

마태와 마가는 어느 쪽 귀라고 밝히지 않고 단순히 귀가 떨어졌다고 밝힌다.

반면 누가와 요한은 오른쪽임을 밝혀 사건의 정확성을 보강한다.

 

한편 대제사장의 종처럼 신체의 어느 부위가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제사장을 시중들고 봉사하는데 부적격자로 판명이 되면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을 못했다. (Jos., Antiq. 14:366).

 

그리고 유대 사상에 의하면 종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그 종의 주인이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종 말고가 귀를 잘린 것은

그가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할 수 없을뿐더러

그는 직업을 잃어버리고 생계를 위협받게 되는 것이었다.

 

아울러 자신의 종이 공격을 받아 간접적으로 모독을 당한 대제사장은

신성 모독죄를 적용해 예수의 제자들을 탄압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은 사실들을 너무도 명확히 아셨으며

그래서 종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고 제자들의 공격을 만류하셨던 것이다.

 

 

[22: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이것까지 참으라 - '이것까지 참으라'라는 말을

KJV'너희는 이보다 더한 고생도 받으리라'(Suffer ye thus far)라고 번역한다.

 

따라서 이 의미는

'너희의 항거는 이정도로만 하지 더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과 함께

'내가 잡히더라도 너희는 항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은 그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전달해 준다.

'이것까지'라는 말은 '헤오스 투투'로서 '여기까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참으라'는 뜻의 '에아오''버려두라', '가게 하라'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어 그들 마음대로 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참뜻을 몰랐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체포가 어떤 의미를 주며 그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따라서 제자들의 이런 무분별한 저항은 오히려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 이 표현의 중심은 치료하는 기적에 있지 않고

치료하는 행위에 있다.

 

'참으라'고 한 말에 대한 구체적 행위로서 적의 상처를 치료해 주신 것이다.

 

즉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제자들의 흥분을 막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요한복음에도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진술이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검을 도로 꽂으라고 지시하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교훈과 함께

당신이 힘이 없어 잡히는 것이 아니라고 책망하는 어투로 묘사한다.

 

(26:47-56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편 예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21:24)는 구약 율법의 말씀을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5:39)

사랑의 말씀으로 바꾸어 놓으셨으며, 또 이를 몸소 실천하셨다.

 

따라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여 주셨다.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그는 실로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원형이었다.

 

 

[22: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의 정체를 언급하는 이 구절은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마태와 마가는

무리가 등장하는 초기에 무리의 정체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부터 파송된 사람들이라고만 언급한다.

 

(26: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그러나 누가는 무리의 정체를 예수가 체포되는 순간에 언급한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라고 밝히며

서기관들 대신 성전의 군관들(경비 대장들, the officer of themple guard, NIV)

언급한다.

 

누가가 성전의 군관들을 언급한 것은

4절에서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의논한 대상이

대제사장들과 군관이었다고 언급한 것과 일치된다.

 

아울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제사장들이 직접 체포하러 오면서

성전 수비대를 이끌고 온 것은 타당하다.

따라서 누가의 진술이 설득력이 매우 강하다.

 

한편 이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갖은 음모를 다 꾸몄다.

 

간악한 질문을 통해 책잡으려고 하는가 하면,

안식일을 범했다고 모함하고, 귀신들렸다고 비방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때가 이를 때까지 그들의 비방과 함정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을 전하셨다.

 

그런데 이제 때가 이르자 유대의 사악한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자의 배반으로 인해 예수는 죽음의 무리들에게 넘겨지게 된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것 같이 검과 몽치를 - 이 구절은 37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수 자신이 불법자와 동류(同類)로 취급당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확인하는 말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즉 예수는 범죄자로서 공권력에 의해 체포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이후 3년 동안 틈만 나면 예수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할 만한 정당한 근거가 없었고,

또 그들은 군중들의 눈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밤에도 정당한 근거가 없어 강도를 잡듯이

중무장하고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야심(夜深)한 시각에 나타났던 것이다.

 

 

[22: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의 말씀대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낮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공식적으로 체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성전에서 낮에 예수를 체포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할 정당한 사유가 없었으며

아울러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체포한 뒤의 군중들의 반응을 그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낮에 성전에서 예수를 체포하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가룟 유다의 배반과

유대 지도자들의 기회 선택이 안성맞춤으로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 앞에서 상기시킨 말,

즉 예수의 활동에 열광적으로 따랐던 민중들의 열기에 상대적으로

지도자들이 위축되고 두려워했던 때는

빛과 어둠의 대결에서 빛이 득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제 사태가 역전되어 다시 어둠이 득세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마태와 마가는 이를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로서 언급하고 있는데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14: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누가는 3절에서 유다의 배신이 사단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 바 있듯이

예수의 체포 역시 악의 집단적 세력에 의한 것임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어둠의 시대가 주는 고통과 치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자세는

초대 교회가 경험할 박해가

마땅히 겪게 될 제자 됨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의 어둠의 세력에 의한 것이라면,

 

승리의 심판자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도

고난과 박해, 그리고 순교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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