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다의 길 2
[눅 23:28-32]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예루살렘의 딸들아 - 뒤따르는 무리들 특히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애통하여 우는 것에 대한 예수의 반응이 31절까지 묘사되며
19:41-44에서 언급된 내용을 연상하게 한다.
(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는 울며 십자가 뒤를 따르는 여자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있지만
많은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을 딸과 여자로 혹은 '시온의 딸'로 묘사한 점으로 보아
넓게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사 1:8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10:32 아직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37:22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미 4:3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슥 2: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이 말을 하기 전에 예수는
자신을 위해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바 이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애통하고 슬퍼해야만 할 일이 전제되는 것인데,
예수는 구원사적 의미에서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며
그것은 인류 구원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는 애통해하는 관심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정작 마음 아프고 가슴 칠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성이다.
이같은 예수의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는 언급이 19:41-44에 나오고 있다.
(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또 십자가상에서 기도한 내용, 즉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본문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무지(無知)였다.
[눅 23: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 보라 날이 이르면 - 예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하신 단어
'보라'(이두)로 시작되는 구절이다.
'날이 이르면'이라는 표현은 종말에 관한 언급 때 사용되는 상투어
'때가 이르리니’
(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그 날에’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17: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21: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 앞에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아
'날'이 언제인지 한정짓지 않는다.
따라서 이 '날'을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을 예언한 것으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를 종말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그 종말은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
역사 속에서 내리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로도 이해할 수 있다.
'날'이 복수로 언급된 사실은
한 시점의 심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최종적 종말의 때까지
계속되는 현재적 심판의 날들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 준다.
▶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 21:23에서 예수께서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21: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여기서는 그 반대로 수태 못하고 해산하지 않고 젖 먹이지 못한 여인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축복 선언을 하신다.
결과적으로 21;23에서 처럼 아이 밴 여인들과 젖먹이를 둔 여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저주이다.
이렇게 완곡어법을 쓴 것은 계속적으로 저주하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저주 선언은 다산(多産)과 많은 자녀가 축복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가치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하며,
현재의 사고방식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 날에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을 의지하여
전혀 새롭게 변혁된 사람만이 요구되고 살아남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실제의 한 예로서 A.D.70년에 로마 장군 디도(Ditus)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도 여자들과 아이들이 미처 도피하지 못하여 많은 화를 입었다.
[눅 23: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 심판과 저주의 날에 저주를 받게 되는 자들이
그날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산이 무너져 자신들을 덮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 같은 묘사의 강조점은 그날의 심판과 저주의 가공할 무서운 상황에 있는데,
이 호소의 목적은 호 10:8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호 10:8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첫째는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을 가려주고 막아 달라는 뜻이다.
반대로 둘째는 고통이 너무 심하여 차라리 산이 무너져 내려
자신을 덮어 죽임으로써 고통을 잊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아무튼 강조점은 심판과 저주의 무서운 고통에 있다.
(계 6;16 산들과 바위들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왕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숨기라).
[눅 23: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 격언구 형식의 이 구절은
28-30절까지의 내용을 압축 요약한 것이다.
(28-30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는 싱싱하고 힘찬 것으로서(시 1:3 참조) 무죄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늙고 힘없는 것으로서(렘 5:14; 유 12절 참조)
거짓되고 죄악스러운 것으로 이해된다.
(렘 5:14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
유 12절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따라서 푸른 나무를 예수로, 마른나무를 불의한 유대인으로
대비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Bengel, Meyer, Godet, Bruce).
혹자는 푸른 나무를 예루살렘의 융성 시기로 보고
마른 나무를 예루살렘의 쇠퇴기로 비유하여
그 멸망을 예고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Gilmour).
또한 쉥크(Schenk)의 경우는
일반적인 죄인들과 예수를 처형하고 선지자들을 처형했던
죄 많은 유대인들을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로 비유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본 구절은 심판의 엄격성과 가공할 위력을 보여 주려는데
강조점을 둔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눅23: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이와 더불어 두 사람의 사형수를 소개한다.
이 두 명의 사형수는 십자가상에서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한
질문과 대답을 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사람이다.
(39-43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형수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일반 사형수와 같이 강도나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당하여 처형되신 것임을 말한다.
아울러 이는 22:37과 사 53:12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를 확인시켜 준다.
(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사 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그러나 이 두 행악(行惡)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마태와
(마 27: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마가에 의하면 그들은 강도였다 한다.
(막 15: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아마 살인과 방화 등을 서슴지 않은 흉악범(凶惡犯)이었을 것이다.
*참조 : (41절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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