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일요일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수태하지 못하는 자와 해산하지 못한 태와 젖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십자가

 

(23:26-31)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붙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주고 그가 예수님 뒤에서 그것을 지고 가게 하였더라.

27) 백성과 또 그분으로 인해 슬피 울며 애통하는 여자들의 큰 무리가 그분을 따라오더라.

28)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돌이키시며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29)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수태하지 못하는 자와 해산하지 못한 태와 젖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때에 그들이 산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여 이르기를,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그들이 푸른 나무에 이런 일들을 행할진대 마른 것에는 무슨 일을 행하리요? 하시니라.

 

 

우리는 이제 거룩한 예수님,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제물로 "희생되려는 어린 양"처럼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가 재판을 받는 과정을 살펴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이처럼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런 일을 처리할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상시의 일을 하던 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날이 새자 대제사장들 앞에 끌려 나갔고

 

(22: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그후 빌라도에게 끌려갔다가 헤롯에게, 그리고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 왔다.

그리고 빌라도와 백성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조롱당하고 가시로 만든 관을 쓰고 갖은 모욕을 당하였는데

이 모든 일이 너댓 시간, 길어야 여섯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9시에서 12시 사이에 십자가에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결박한 자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하였다.

왜냐하면 성()의 다른 끝에 있던 그의 동료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구하려고 달려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내쫓김을 당한 자"도 없었다.

그 자신도 "잠시 동안 너희는 나를 못 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잠시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를 처형시키려 끌고 나갔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 "십자가를 진" 한 사람.

 

그는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갔다.

그는 아마 그리스도의 친구였거나 친구로 알려졌던 자인 것 같다.

이 때문에 그에게 화가 미쳤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에게 지우고

"예수를 좇게" 하였다.

 

(26절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 밑에서 기절하거나 숨을 거두어

그들이 꾸민 음모에 차질이 생기게 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에게 이처럼 쉼을 주는 것도 자비였으나 그것은 "잔인한 자비"였다.

 

 

. "슬피 우는" 큰 무리.

 

진심에서 "슬피 우는 자들"이 그의 뒤를 따르며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그의 친구나 지지자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동정하고 있는 적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명성을 들었고,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가 알고 있었으며

그가 아무 죄도 없이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뒤를 따르는 무리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평소에도 사형 집행이 있을 때엔 많은 무리가 따랐지만

이와 같이 유별난 죄수의 사형집행엔 더 많은 무리가 뒤를 따르기 마련이었다.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특히 그들 가운데엔 여자가 많았다.

 

(27절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측은해서 따라오는 자들도 있었고 호기심에서 따라오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그의 각별한 친구나 친지들처럼)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그를 욕하고 저주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를 인정하고, 그를 측은히 여기며, 그를 보고 안타까워하고,

그의 고난을 함께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주 예수께서 기진맥진하여 가시는 모습을 보고

낯선 자들도 동정심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그를 위해 울었으며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던 자들도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지금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골몰해 있었을 것이라고 누군가 생각이 들겠지만

그는 그들의 눈물을 보실 시간과 마음을 지니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슬픔으로 기진맥진하였으나" 그들의 눈물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계셨다.

그는 "돌이켜 그들을 향하였다".

그들이 낯선 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당부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슬픔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켰다.

 

1. 예수님은 그들에게 슬픈 울음에 대한 일반적인 지시를 하였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그를? 위하여 울었다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사실 굳어질 대로 굳어져서

그렇고 그런 사람의 그렇고 그런 고통을 보고는 도무지 동정을 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위해서 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함이 없었다)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멸망의 날을 보면서

"너희와 너희들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분부하셨다.

 

그들 중에는 살아서 그 멸망의 광경을 보게 될 자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필히 그것을 보게 될 것이므로

그들에겐 이 자녀들이 문제꺼리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볼 때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울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함을 명심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가 측은히 여기는 한 평범한 사람의 죽음으로 우리도 같이 그 죽음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우리의 친구의 죽음으로 보아선 안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의 적들에 대한 승리이며 성공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해방이며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의 값을 치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울되, 예수를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우리 자신의 죄, 우리 자녀의 죄를 위하여 울어야 한다.

 

그리고(여기에 언급된 눈물처럼)

우리가 유대 백성들처럼 예수의 사랑을 무시하고 그의 은혜를 거부할 때

유대 백성들에게 앞서 말했던 멸망의 날이 닥치듯

우리에게 닥칠 불행의 날로 인하여 울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하는 친족이나 형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을 때,

우리는 그를 위해 울 필요가 없다.

그는 이제 육체의 짐을 벗어버리고 성결함으로 완전을 입고서

완전한 쉼과 기쁨의 곳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죄악의 세상, 슬픔과 근심의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한다.

 

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하는지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고 계신다.

 

"보라, 슬픈 때가 너희 성읍에 임하고 있다.

너희 성읍은 무너질 것이고 너희는 그 멸망 가운데 거하게 되리라."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서로 헤어지면서 제자들이 "하늘나라에 속한 일"로 울 때,

그는 제자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며 "다시 보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뻐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러나 이 "예루살렘의" 딸들이 "세상적인" 슬픔으로 "그를 위하여 울"

그는 그들의 눈물을 다른 데로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다른 슬픔거리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셨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그리스도는 얼마 전에 예루살렘 때문에 우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에게 이 때문에 울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눈물은 우리를 울게 만든다.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모시는 시온의 딸들아,

그 안에서 기뻐하라. 그가 너희를 구하러 오시리라.

 

그러나 그를 위하여 울면서도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지 않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그가 너희를 심판하러 오심을 기억하고 그로 인하여 슬피 울지어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두 가지 암시적인 단어를 통하여 예언되었는데,

그 말이 그들에게 적시에 먹혀 들어가

그들에겐 공포의 말로 들렸으며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모두 무자식(無子息)과 생매장되기를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

 

(1) 그들은 무자식 팔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라헬이 레아를 부러워하듯, 자식이 없는 자가 자식 있는 자를

부러워하는 것이 상례이나 그때에는 자식을 가진 자들은 도망을 치는데

자식이 짐이 되며 자식이 "굶어 죽거나", " 칼로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얻게 되어

그들은 자식이 없는 자들을 부러워하여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할 것이며

"살인자에게 내어 줄" 자식과 손에서 "빼앗길" 자식이 없는 자는 복되도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때에는 아이를 키우거나 젖먹이고 있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뿐만 아니라

이미 옛날에 자식을 출산하고 젖을 먹여서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자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다.

 

* 참조 (9:11-14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 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 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13) 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14) 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피조물의 덧없음과 그 위로의 불안함을 명심하라.

우리에 대한 하늘의 섭리가 이처럼 변하여 우리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주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우리에게 더없이 큰 짐이 되고 걱정과 슬픔이 되고 만다.

 

(2) 그들은 "생매장"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30"그때에 사람이 산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이 말씀은 호세아 108절에 있는 예언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재앙의 소란을 피하기 위하여 깊은 굴속에서 숨기를 원할 것이다.

그들은 아무 지방이라도 가서 그곳에 거하려 하겠지만

그곳도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권세 있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일 것이다.

 

(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리스도에게 피신해 그의 보호하심 안에 거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은

"산들과 작은 산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달라고 호소할 것이나

그것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수난을 통해 이와 같은 멸망이 예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여 주신다.

 

(31"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어떤 주석자는 이 말씀은 에스겔 2047절에 있는 말씀.

"내가 너희 가운데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나무를 멸하리니"에서

인용한 것이라 한다.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1) 좀 특별한 의미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앞서 이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유대인들이 그 예수를 죽임으로

그들에게 닥칠 멸망인 것이다.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이들)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죄 없고 뛰어난 인물을 다만 선을 행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고통을 주거든,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악에 대하여 어떻게 심판하실까 생각해 보라.

 

그는 이미 그들을 마른나무로, 패역하고 거짓된 세대로,

아무 일에도 쓸모없는 자들로 만드셨지 않았는가?

 

이것이 그들의 죄일진대 그들에게 내릴 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잖겠는가?"

 

혹은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로마인들, (로마 심판관들과 그들의 군사들이) 그들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나를,

그들에게는 푸른 나무로 여겨질 나를 이처럼 박해하니,

유대 민족과 예루살렘은 어떻게 대할지 상상하고도 남지 않겠느냐?

 

유대 민족은 그들에게 반역하여 스스로 마른나무가 되어

그들의 원한을 불지를 불쏘시개가 되어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이같은 고난을 내게 내리도록 하시거늘,

종종 베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책망 받았던 썩고

마른나무들인 너희들에게 내릴 형벌은 어떤 것일까"?

 

(3: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 죄인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신 말씀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죄로 인하여 희생 제물이 된 이유로 이와 같은

고난에 맡겨 두신 하나님께서 죄인들 자신에겐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리스도는 "푸른 나무," 열매가 풍성한 나무였다.

그러한 그가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심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중재하지" 않았던들

온 인류에게 미칠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이며,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모든 조건을 마련해 주었는데도

계속 마른나무인 채로 남아 있으려는 인간들에게 내릴 진노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가 지신 죄 때문에 이처럼 하시거늘,

죄로 물든 진노의 세대에 대하여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

 

푸른 나무에 대해서도 이런 고난을 허락하신 아버지께서

마른나무라고 진노를 참으실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 주 예수께서 받으신 쓰라린 고난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추상같은 정의를 발견하고 그 앞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완전한 성도라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마른나무"에 불과하다.

그가 고난을 받으셨는데

어찌 그들이라고 고난받지 않겠다는 보장을 얻을 수 있으랴?

 

더구나 죄인들이 받아야 할 진노의 저주는 어떠할 것인가?

 

*메튜헨리의 주석을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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