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5일 화요일

주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가 그분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베드로의 타락

 

(누가복음 22:54-62) 그때에 그들이 그분을 붙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니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가니라.

55) 그들이 집회장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자리를 잡으매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앉으니라.

56) 그런데 어떤 하녀가 베드로가 불 곁에 앉을 때에 그를 보고 유심히 그를 바라보며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57) 베드로가 그분을 부인하여 이르되, 여자야, 나는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니

58) 조금 뒤에 또 다른 사람이 그를 보고 이르되, 너도 그들과 한 패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사람아, 나는 아니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시간이 지나서 또 다른 사람이 자신 있게 단언하여 이르되, 이자는 갈릴리 사람이므로 진실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매

60) 베드로가 이르되, 사람아,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그가 아직 말할 때에 즉시 수탉이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가 그분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62)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우니라(KJV 한글)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그의 선생을 부인하는 슬픈 이야기를 읽게 된다.

 

그의 선생은 대제사장과 음모를 꾸민 자들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날만 새면" 산헤드린의 공회에 그를 고소하려고 증거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66절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그러나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앞에서 시험 당하신 것에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다"는 정도로만 기록하고 있다.

 

(54절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그러나 그 표현 방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를 잡아끌고 들어갔다."

이 말씀은 사울에 관한 기록을 생각나게 한다.

 

(삼상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그는 돌이켜 행하여 내려갔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들이 비록 자기들이 바랐던 포획물을 얻었지만

그들은 대단히 혼란한 지경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백성들이 두렵거나 또는 그들이 보고들은 바에 의해

내부의 두려움이 생겨 그를 먼 길로 우회해 데려 온 것 같다.

아니면 어디로 가야 그를 재빨리 데려 갈지를 몰랐던 것 같다.

그들은 마음만 조급했을 것이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자.

 

 

. 베드로의 타락.

 

1. 그것은 "몰래 들어가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선생이 죄인으로 붙잡혀 갈 때 "그를 따라갔다."

 

이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의 선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위험에서 벗어날 정도로 "멀리서" 좇아 왔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랐다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의 양심이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명예를 지킬 정도로 "멀리서" 따랐으며 몽유병 환자처럼 따라갔다.

 

2. 계속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가다 제사장의 종들과 한데 어울렸다.

 

그 때 그는 그의 선생 바로 곁에 있었어야 할 처지임에도,

"종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그날 밤에 있었던

모험담을 듣기 위하여 "함께 앉았다."

 

아마 말고(귀가 잘렸던 대제사장의 종)"그들 가운데" 있었을 것이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처럼,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도록 "그들 가운데" 앉았다.

 

그가 그리스도와의 모든 친분, 그와의 모든 관계를 부인하고

그가 지금 절망과 위험에 빠져있다는 이유로

그를 모른다고 한 것이 그의 타락이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그 집에 속한 비자(여종)에게

그가 이 "예수"와 함께 있던 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이로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가 "불가에 앉아 있을 때",

그녀는 전에 본 적이 없던 낯선 자가 앉아 있으므로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그리고 밤중 이 시각에 일없는 자가 여기 나와 있을 이유가 없는고로

그가 대제사장의 수하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그를 예수의 수행원으로 결론 내렸을 것이다.

 

아니면 언젠가 성전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 그도 함께 있어

그의 시중을 드는 것을 보았던 적이 있어서 그를 기억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질문을 용기 있게 "인정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재치있게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재주도 없었으므로 엉겹 결에 부인하고 말았다.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3. 그의 타락은 두 번째 반복되었다.

 

(58절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조금 후에" 그가 자신을 돌이키기 전에,

"다른 사람이 보고" "너도 그 당이라.

 

간교하게시리 대제사장의 종들과 함께 여기 앉아 있구나" 하였다.

 

"나는 아니다."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다.“

 

다시 "세 번째 한 시쯤 있다가"

(왜냐하면 유혹하던 자가 "그가 앉을 때 함께 앉자 우리가 지난날 손해 입은 것을 그로부터 다 얻어내기까지 계속 타격을 주자" 하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이" 자신있게 냉담하여 말하길,

 

"그가 아무리 부인을 하나 이 사람은 그와 함께 있었다.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거짓말을 한 자는 계속 그 거짓말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죄의 시초는 물 보를 터놓는 것과 같다."

 

베드로는 이제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고 잡아떼고 있다.

 

(60절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이 예수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조차 없다."

 

 

. "베드로가 다시 정신을 차림."

 

그가 자신을 되찾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보라.

그보다 그를 돌이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라. 그 과정을 살펴보자.

 

1. 그가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째 부인하는 순간 "닭이 울었다."

 

이 소리를 듣고 그는 깜짝 놀라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

사소한 일을 통하여 중대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유의하라.

 

2. "주께서 돌이켜 그를 돌아 보셨다."

 

이 장면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참으로 놀라운 장면임엔 틀림없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선 ""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이 사실을 통해 그에게 하늘의 지혜와, 권능과 은혜가 풍성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증거를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베드로에겐 등을 돌리시고 심문을 받고 계셨지만

(당시 그는 무언가 생각하고 계셨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베드로가 하는 짓을 모두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계심을 명심하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그리스도도 그를 포기하고 다시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아버지 앞에서도 그를 모른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베드로를 부인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루듯 그리스도도 우리를 다루시지 않으시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돌아 보셨다."

베드로가 곧 깨닫게 될 것을 의심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입술로는 부인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자기를 보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방금 대단히 중대한 죄를 지었음에도 그리스도는 그를

"부끄럽게" 하거나 그의 잘못을 폭로하시기 위해 "그를 부르시지" 않고,

단지 돌아만 "보았다".

 

이것은 베드로 외엔 아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기에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1) 그것은 "깨닫게 하는" 눈길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야, 정말 나를 모르냐?

내 얼굴을 보렴, 그리고 그렇게 말해 보라"고 말씀하시듯 돌이켜 그를 보셨다.

 

(2) 그것은 "꾸짖는" 눈길이었다.

 

그는 베드로를 돌아보면서 얼굴을 "찡그렸을" 것 같다.

그리고 약간 "불쾌함"을 표시했을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를 돌아보시는 그리스도의 화난 얼굴을 생각해 보자.

 

(3) 그것은 "훈계하며" 질책하는 눈길이었다.

 

"베드로야, 이게 무슨 일이냐? 지금 나를 위해 와서 증인이 되어야 할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다니. 네가 제자이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장 자신있게 고백했고

결단코 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네가 아니냐?"

 

(4) 그것은 "연민"의 눈길이었다.

 

예수님은 부드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불쌍한 베드로, 네 마음이 이렇게 약하다니!

내가 돕지 않는다고 이렇게 넘어지고 실수를 하다니!"

 

(5) 그것은 무엇인가 "암시하는" 눈길이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은혜를 담은 눈길이었다.

닭이 울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그를 보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회개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별한 효력 있는 은혜가 없으면 외적인 수단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제 정신을 차리게 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이 눈길과 함께 권능이 나갔다.

 

3. 베드로는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일어나며,

그 말씀을 마음에 심어 주고,

그것을 양심 안에 안착시켜 영혼에게 행복의 계기를 줌을 명심하자.

 

Tolle et lege - 즉 그 말씀을 듣고 읽어라.

 

4. 그리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돌아보심으로

그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을 알고 눈물이 쏟아졌다.

촛불은 방금 꺼졌다. 그렇게 사소한 일로 다시 꺼지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대제사장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감명을 주시지는 않았다.

 

베드로에겐 다시 일어날 만한 씨앗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눈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베드로를 돌이키며 그를 올바른 상태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메튜 헨리의 주석을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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