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3일 일요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배반하느냐?

  

유다의 배반

 

(22:47-53) 그분께서 아직 말씀하실 때에, 보라, 한 무리가 오고 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보다 앞서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그분께 가까이 나오더라.

48)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배반하느냐? 하시니

49) 그분 주위의 사람들이 뒤따를 일을 알고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더라.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오른쪽 귀를 베니

51)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것까지도 허락하라, 하시고 그의 귀에 손을 대사 그를 낫게 하시더라.

52) 그 뒤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온 수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치듯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었을 때에는 너희가 나를 치려고 손을 내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시간이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KJV 한글)

 

 

 

사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두렵게 하여 정신을 잃게 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 (늘 하는 식으로)무력과 무기로 그를 잡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 무리를 동산으로 끌어 왔다.

 

"그들 가운데엔 사탄이 있었다."

 

. 유다를 통한 식별. 그곳에 수많은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 선두엔 유다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잡으려는 무리를 인도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유다가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하였다.

그들이 그곳에 와서도 그들은 누가 그리스도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자 유다는 그들에게 자기가 키스하는 자가 바로 그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습관적인 사랑의 표시로 허락하신 그대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다가왔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질문을 주목하고 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게 뭐냐? 이것이 암호냐?

 

(48절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이렇게 인자에겐 숨기고 음모를 꾸미듯,

인자에겐 알리지 않고 그를 해할 계획을 진행시키듯 인자는 "배반당해야만" 하느냐?

 

제자들에겐 못된 교사가 되었던 것같이,

제자들에게 못할 짓을 한 것같이 이렇게 자기 제자에게 버림을 당해야만 하느냐?

 

키스로 배반을 당해야만 하느냐? 우정의 표시가 배반의 도구로 쓰여 져야만 하느냐?

 

영원한 사랑의 표시가 이처럼 더러운 일에 쓰여 져야만 하느냐?

 

주 예수께서는 배반당하시는 것, 그것도 그와 함께 하겠다고,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자로부터 키스를 받으며

배반당하시는 것보다 더한 치욕은 없으셨을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자.

이처럼 그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꾸미며

그의 종들을 핍박하는 자들,

값없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사랑을 행하는 것처럼 속이며

성결하고 엄격한 행실을 바탕으로부터 흔들어 버리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거룩한 듯 흉내는 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들에게 키스를 받으시며

배반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예는 수없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의 양심에 그리스도께서 지금 유다에게 하신 질문.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그가 이것에 노하시지 않겠느냐?"

"그가 이것에 그대로 갚으시지 않겠느냐?

같은 질문들이 들여지게 된다면 다행일 것이다.

 

 

. 그를 보호하려는 제자들의 노력

 

(49절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무장한 자들이 그를 체포하려고 온 것을 보고 그들은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주께서 우리가 검 두 개를 가지는 것을 허락하셨나이다.

이제 그것을 쓸까요?

아직 한 번도 쓸 기회가 없었습니다.

검을 쓰지 않는다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은 마치 자기 선생의 허락 없이는 칼을 빼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너무도 "다급하고 흥분되어" 있어서 대답을 기다릴 겨를조차 없었다.

 

그 중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들 중에 한사람의 목을 겨냥해 휘둘렀으나

빗나가 "그의 오른편 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잡으러 온 무리들을 물리치심으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보여 주셨듯이,

베드로도 이와 같은 돌발적인 사건을 통하여

그가 허락만 받는다면 선한 목적을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다른 복음서에선 이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누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가르치고 있다.

 

1. 칼부림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과.

 

"이것까지 참으라."

 

(51절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휘트비(Whitby)박사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잡으러 온 적들에게 한 말로써

그들을 무마시켜 그 일로 흥분해 제자들에게 덮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불상사를 묵인해 달라.

내 허락 없이한 짓이었으며 다시는 칼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해치울 만한, 그들을 죽일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그는 "그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있다.

 

그리고 보는 바와 같이 그를 따르던 자들 중의 한 사람이

그들에게 저지른 실수를 "용서해 줄 것을 구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적들에게도 좋은 말로 대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2. 부상자를 치료함.

 

이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정도 이상의 행위이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그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다."

이는 그(대제사장의 종)에게 이와 같은 상처로 낙인찍힌 채

달아나도록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낙인이 그에게 찍힐 충분한 이유는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심으로,

 

(1) 그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이렇게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반격을 가했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즉시 고치실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아프고 부상당한" 자를 즉각 고쳐 주실 능력이 있으니

이 작은 군대로 무슨 일인들 하실 수 없으랴?

 

(2) 그의 자비와 선하심을 증명하였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

그의 율법의 예를 보여 주셨다.

후에도 그는 "우리를 귀찮게 다루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말씀의 예도 보여 주셨다.

 

악을 선으로 갚으려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같이 하라.

이와 같이 관용 있는 자비를 베풀면 그들이 굴복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 그들을 대단히 부끄럽게 함으로

이와 같이 선을 베푼 자를 감히 행악자로 체포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다.

 

 

. 그를 체포하러 파견되어 온 군관들에게 하신 훈계의 말씀.

 

이렇게 폭도들을 몰고 소란을 피우며 찾아 온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깨우쳐 주셨다.

(52-53절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마태는 이 말씀을 무리에게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이 말씀을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전의 군관들은 제사장들로부터 몇 가지 지시를 받고 왔을 것이며

그래서 여기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사이에 언급되고 있는

성직자들로서 이와 같은 가증스런 일을 위해 채용된 자들이었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가장 높은 계급의 사람들도 역시 비난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 그들의 방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추종."

 

이 어두운 밤에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온 연유가 무엇이냐?

 

(1) 그들은 그가 "저항하지" 않을 것이며 무리를 선동해 그들에게

대적하게 하지 않을 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짓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강도를 잡는 것과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는가"?

 

(2) 그들은 그가 "도망갈" 자가 아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매일 성전에 그들과 함께, 그들 한가운데 있었으며

한 번도 자신을 숨긴 적이 없었고 그들도 그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의 때가 오기 전엔 그를 잡는 일이 그들에겐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이제 그의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이 그를 잡으려 이와 같은 짓을 한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났다.

 

2. 그들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위.

 

우리는 전에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이처럼 내게 닥친 일들이 괴로운 것일지라도 나는 따르리라.

이는 이미 결정된 대로 진행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희가 허락을 받아 너희 맘대로 나를 대적할 때이다.

이 모든 일을 보상받을 내게 약속된 때가 따로 있다.

지금은 어두움의 권세, 이 세상 어두움의 지배자,

사탄이 여인이 난 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여 갖은 악을 행할 때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따르겠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버려 두어라.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37:13 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

 

교회의 적들이 기승을 부릴 때엔 그대로 버려 두어라.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멋대로 하게 두어라.

 

(1) 이 때에 우리의 적대자들에게 승리가 허락된 짧은 시간, 제한된 시간이다.

 

(2) 지금은 "그들의 때"이다.

 

그들에게 약속된 시간이며 그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권세를 시험할 허락을 얻었으나(그들의 시간이 지나)

그들이 무너지게 되면 전능하신 분의 영광은 더욱 빛날 것이다.

 

(3) "앞장 서 달리는 것은 어두움의 권세"이다.

 

어두움은 빛에 그 길을 비켜 주어야 한다.

어둠의 권세는 빛의 왕이 오시는 길을 더 빨리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쟁을 모두 마치고 승리의 날을 기다리셨다.

우리도 역시 그와 같아야 하리라.

 

*메튜 헨리의 주석을 참조 함.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