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31일 화요일
율법의 선포
율법의 선포
출 19:1-25
이스라엘은 애굽 땅을 나서서부터 제 삼월(3개월만)에 시내 광야에 이르고,
산 앞에 장막(진영)을 쳤다. 산이란 오늘날 말하는,
시내산이었으리라.
중첩되어 있는 일군의 산악중의 한 봉우리이다.
이 산에 있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율법의 선포는 행해졌다.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또 그 주어진 상태는 어떠했던가?
이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근본교의를 아는 일이다.
말은 구약적이고,
산만하다 해도, 그 속을 더듬을 때, 확실히 신앙의 기초에 봉착할 수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19,
20장은,
성서 중 가장 주의해야 할 기사의 하나이다.
당초,
율법이란 것은, 이때까지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대체에 있어서는,
매우 친밀했다.
그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의 발기는,
항상 하나님께 있었다.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에 의해, 모세를 보내어 경이 할 사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마치 어미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새끼아래서,
날개를 펴고 따라가면서 이것을 붙들어 주는 것 같았다(4-).
그 관계는 실로 순애였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하신 바도, 어버이와 자녀의 관계였다.
즉 ‘(그러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5-)’이다.
언약(계약)이라 하면, 서로 모르는 사람과의 사이에 행동처럼 들리지만,
본래 이는 법률상의 약속의 의미는 아니다.
컴팩트(compact
사회 계약)가 아니라,
커비넨트(covenant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의 계약)이다.
상인간의 약속이 아니고,
부모 자녀간의 계약이다.
너는 내 자녀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인도할 것이다.
너는 내게 순종해야 할 것이라고.
이는 어버이가,
자녀에게 고하는 사랑의 말이다.
한 가지로 약속이라 하지만,
이것을 약속하는 사람의 여하에 의해, 전연 그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다.
나라와 나라와의 약속이 있고, 친구와 친구와의 약속 있고, 그리고 어버이와 자식과의 약속이 있다.
아브라함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 같은 것은, 분명히 그 후자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시내산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 ‘내 보배(한글역-소유)’즉 부모에게 보배로운 자식이 될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백성이 일제히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여호와의 명하심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8-)’라고 했다.
그리고 보라.
그 때부터 금방(아연) 하나님의 태도는,
일변했던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이미 날개를 펴는 어미 독수리가 아니라,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백성에게 임하는,
심판자로 되신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불과 연기에 싸이고,
나팔 소리 크게 울리면서 말씀하신 것이다.
실로 놀라운 격변이다.
친밀한 부자 사이에,
격리가 생겨, 서로 소원해진 것이다.
알지 못할세라.
이렇게 하여 율법을 선포하신 이유는,
과연 무엇이랴!
사람들은 혹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내게 하신 목적은,
주로 시내산에 있어서의 율법의 선포에 있었던 것이라고.
그렇지만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이야기다(갈라디아서 3장 참조).
율법의 선포는,
이스라엘 역사의 전체에서 볼 때, 일시의 필요에서 나온, 에피소드(Episode)이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 끄트머리는 물론이고,
그 시작도 역시 율법은 아니었다.
그 끝은 은혜였음과 같이, 그 시작도 역시 은혜였다.
그런데 백성들의 여호와에 대한 태도가 변화한 때문에,
여호와께서 부득이 취하신 잠시적인 수단이 즉 율법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목적이 아니고,
은혜와 은혜 사이에 끼어있는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은혜에서 율법으로 옮긴 분수령은,
전기 제8절의 짧은 어구에 있었다.
즉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이는 히브리어 독특의 간결한 말일지라도,
그 함축하는 의미는 깊은 데가 있다.
이는 반역자의 발한 말이다.
이미 애굽 땅을 나서는 때부터,
은혜에 이어 은혜로써 했지만도,
아직 아버지의 사랑을 믿지 못하여,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반역하고 또 반역하여,
언제나 여호와를 타인 취급해 온 이스라엘로서,
지금에 이르러 가볍게 이 말을 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다시 반역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들이 만약 참으로 겸손할 것인가?
즉 반드시 대답했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고자
하지만, 내게 힘이
없습니다. 원하옵기는 나의
약함을 도우소서’라고.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서,
도리어 호연(triumphant)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 우쭐대는 마음을 살펴 알만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않고서,
스스로 감히 하나님과 대등한 지위에 서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있어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도,
또한 일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부득한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불신이 이를 행하게 한 것이다.
여호와는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다만 은혜를 율법으로 변화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이다.
부자,
또는 사제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자제된 자가, 처음에는 유순하게 복종할 뿐이지만도,
이윽고 자기에게 자신이 좀 생기기에 이르면,
윗사람(어른)과 대등한 지위에 서려고 한다.
그때부터 자부는 일변하여,
엄부로 되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윗사람(어른), 그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자제의 태도의 반영(반사해서 비침)이다.
이스라엘 스스로가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여호와 앞에서 거룩해 지려는 때, 여호와는 즉 명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몸을
정결히 하고,
옷을 빨도록
하라. 너희는 예비하여
사흘을 기다리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가까이 하지
말라.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이에 대지
말 것이다.
그런 자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인바
되고, 혹은 살에
씌어 죽임을
당하리라’(19:10-이하 대의)고.
그리고 뇌성은 진동하고,
번개는 번쩍거리고,
빽빽한 구름은 일어나고,
산은 불과 연기를 내어, 진동하는 것이다(16-).
이는 여호와의 변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태도의 반영(reflection)이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언제까지 끝없이 이스라엘을 율법의 속박 중에 방기해 두시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자주 선지자를 보내어,
자기가 사랑하는 아버지이심을 선전케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는 오시었다.
그의 복음에 의해 율법의 속박은 모두 다 해소되었다.
여호와께서는 빽빽한 구름과 나팔을 버리시고,
친히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사랑인 부자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그에게 의지할 수 있게끔 하셨다.
옛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다시 우리의 것으로 되었다(히브리서 12:18
이하 참조).
생각컨대 국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경험은,
또한 개인으로서의 우리들 각자의 경험이다.
우리들도 오랫동안 시내 산록에 장막을 치고 있던 자였다.
하나님을 높은데 계시는 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이, 그저 공포 전률해야 할 이로 생각하고,
숭고 삼엄한 광경 중에, 그를 예배하려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는 모두 우리들의 불신의 마음, 교만한 마음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앙망하면서부터,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장벽은 모두 다 철거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친밀한 부자의 관계로 되돌아와,
주저하는 일 없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에 이르렀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찌나,
하나님께 친압하여 무례히 행치 않고, 감사와 경외로써 그 앞에 무릎 꿇을 수 있게 되었다.
율법의 선포는,
이스라엘의 불신의 결과였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일단 그들을 죄로 몰아 넣으심과 동시에,
이로써 보다 큰 은혜의 기회가 되게 하셨다.
율법은 율법 위한 율법이 아니라,
은혜 위한 율법이다.
사람의 불신은,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불렀다.
실로 측량키 어려운 하나님의 사랑의 깊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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