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의 하사 2
출애굽기 16장 :
만나에 중요한 두 가지 성질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는,
매우 담백(맛과 빛이 깨끗하고 산뜻)한 식물이었다.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해가 뜨겁게
조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16:14, 21-)’.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민수기 21:5-)’.
즉 안다.
만나는 너무나도 담백하고,
가벼운 식물(경식)이었기 때문에,
오래 가는 동안에는,
사람에게 싫증을 주는 식용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 것이다.
또 둘째로,
만나는 저장하기 어려운 식물이었다.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20-)’.
즉 주어지는 그 하루 동안에 먹어야 할 성질의 식물이었다.
이러한 식물은,
이것을 천연물로서 보기는 곤란하다.
후에 이스라엘인이,
만나를 가리켜 ‘천사의 식물’이라고 한 것은,
실로 까닭 있는 일이다.
만나는 확실히 천연물이 아니고,
기적물 이었다.
이적물인 만나의 성질은,
또한 신자가 신앙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하사되는 식물이다.
신앙에 의해(믿음으로)
광야(황야)의 생애를 보내는 자는,
자기의 손으로 된(손에서 나는)
식물에 의뢰(의존)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식물에 의존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식물이 농후중밀한 미식이 아니라,
담백경소한 조식임은,
이것을 맛보는 자 모두 아는 바이다.
이슬과 함께 내리고,
서리 같이 세미 한 것으로,
해가 뜨겁게 쪼이면 스러지는 것,
이는 신자의 일용양식이다.
이른바 간이생활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중에 신자의 상태로 되는 것이다.
가령,
집에 여재가 넉넉히 있다할지라도,
여호와께 의존하는 자는,
자기의 생활의 안락포만을 바라지 않는다.
이 세상을 즐기면서도,
아직 불만족하게 여기는 것은,
불신자의 일이다.
광야(황야)로 인도되는 자에게 있어서는,
아침 이슬과도 흡사한 무미담백한 만나가,
역시 몸을 보양하는데 족한 요리(가효-맛좋은 안주로도 통하나)이다.
주 예수는 가르쳐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또 말씀하셨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오늘을 오늘로서 감사하고,
내일을 내일로 넘겨 신뢰한다.
이는 시인이 노래한 생애이다.
그리고 이는 신자가 실험(체험)해야 할 생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신 것을,
오늘 사용하여,
그리하여 하나님 위해 힘쓰는 일은 않고서,
헛되이 후일의 결핍을 걱정근심하고,
이것을 저축 보존할 것인가?
보라,
이튿날이 되면,
이미 벌레가 생겨 냄새가 나는 것이다.
이러한 실례는 결코 진기한 것은 아니다.
지방 농촌 등에 있어서,
자손을 위해 미전을 사고,
수십만의 부를 저축하여,
일가영원한 계획을 확립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이미 그 아들에게 도덕적 경제적 파산은 다가왔다는 등의 사실을 종종 실견한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신 것을 사유로 하여,
다음 시대의 결핍에까지 대비하려는 때,
이에 벌레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세계에 통하는 사실이다.
경제학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저축의 필요를 말한다.
그러나 경제학의 원리는,
반드시 신앙의 생애에 적용되지 않는다.
신앙의 생애에는 독특한 심적 태도가 있다.
또 독특한 은혜의 사실이 있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써 족히 여기고,
내일은 이것을 하나님께 맡기고서 사는 사람은,
오늘의 필요를 제쳐 놓고서까지 하는 저축의 필요를 알지 못한다(필요까지는 갖지 않는다).
저 유명한 미국의 무디(Moody,
D. L. 1837. 2. 5-1899. 12. 22 전도사, 대 부흥사)가,
조금도 은행에 예금을 가지는 일 없이도,
한 자루의 펜(pen)을 움직이는(사용하신)
때는,
순식간에 백만 달러(100만 불)의 돈을 수금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리의 말인데,
아직 한 무명의 전도자였던 시대의 무디의 생활은 더욱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한 데가 있다.
그는 소매상인의 고용인(정원)을 그만두고서,
독립 전도자가 되었지만,
본래 집에 저축한 것 없고,
처자를 부양할 만한 자산이란 전무했다.
그렇지만 무디는 조금도 이것을 걱정 안 했다.
노동자는 토요일마다 그 고용주에게 급료의 보수를 받듯,
자기도 가장 확실하고 가장 신뢰할만한 고용주에게서 노동의 보수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월요일부터 6일간의 필요품을 상인에게서 꾸어왔다가,
그리고 토요일마다는 어디서라고 할 수 없지만,
은혜로 주어지는 돈을 써 그 지불을 끝냈다.
그때,
남는 것이 생기면,
즉 이것을 가난한 빈궁자에게 주었다.
이렇게 하여 일요일에는,
또한 전과 다름없이 무일물(무활일분)의 생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혹은 또 존스 홉킨스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의 교수로서 대의인 켈리(Kelly)씨 같은 이도 그러하다.
그의 외과의로서의 명성은,
드디어 독일의 도규계(의학계)를 떠들썩하게 하여,
매년 반년을 독일에서 보내도록 요청된 정도의 인물인데,
그는 언제나 말한다(내촌상시는 생존이어서 현재사사용).
‘나의 은행장부는,
꼭 지불장부
아래 있다’고.
즉 전자의 액수가,
후자의 액수를 넘지 않는 것으로써 진자로서의 합당한 생활로 여긴 것이다.
실로 건전하고도,
행복한 생애이다.
이 비의를 해석(해독)하지 못하여,
부의 축적에 부심하는데서,
허다한 해악을 낳는 것이다.
이번 대전(세계대전,
즉 제1차 대전-제2권말 부록 참조)
같은 것도,
그 주요한 원인은 여기에 있다.
영독 서로가,
남을 몰아내고(구축하여),
세계 무역의 패권을 장악하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떤가!
일일한 나라의 전비는 5천만 원,
꾸준히 쌓은 거부도 일조에 소멸된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아무든지 아침에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고.
다음으로 참된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들의 영혼의 식물이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21-)’이다.
영의 양식(신령한 양식)을 거두는데 가장 좋은 방법도 또한 깊은 잠(숙수)에서 깨어나,
피로는 풀리고 마음은 청신하며,
눈은 아직 다른 것에 접촉하지 않은 때,
먼저 성서를 펴서 읽어야 할 것이다.
정독 1장 혹은 반장,
혹은 수절,
이로써 하루의 양식으로 하기에 족하다.
그렇게 날을 거듭해감에 따라,
반드시 영을 키우는데 지대함이 있으리라.
부인 기타 다망한 이들은,
취침 기상 각 15분간을 빨리만 하면,
즉 족한 것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각기 식량대로’해야 할 것이다.
성서에 흥미를 느끼는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성서 지식을 흡수하는 것은 해있고,
익은 없다.
성서는 이 세상의 지식은 아니다.
성서의 지식은,
실행과 함께 받아들여 비로소 유용한 것이다.
하루 분의 것을 받아,
하루의 실행을 하면,
내일은 내일에 필요한 것이 주어지는 것이다.
즉 여기서도 저축심을 방기해야 할 것이다.
‘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호멜씩 거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내일은 여호와의 거룩한 안식일로서 휴식이다-일역)(22-23)’고.
즉 여호와께서 안식일의 성수를 백성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 전날에는 이 일 분을 내려주시고,
안식일에는 내려주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을 한 개의 우와(a
fable)라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시험 삼아 신앙의 실험(체험)으로서)
이것을 실험해 보면,
그것이야말로 4천 년래 부동의 진리임을 안다.
여호와께서는 안식일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그날의 양식을 다른 날의 분량과 함께 합쳐서 주신 것이다.
즉 6일분에 대하여,
7일분의 급료를 지불해 주시는 것이다.
만약 세상의 종(노복)에 대하여 이처럼 하는 이가 있을 것인가!
누가 그 하루가 참으로 은사임을 의심하는 자 있으랴!
그러므로 만약 하루를 다른데 가서 벌이하면,
이는 즉 주인의 손에서 하루를 훔치는 일(정취)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볼찌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29-)’라고.
안식일은 은사,
즉 주어진 것이다.
명령은 아니다.
특권이다.
의무는 아니다.
이것을 계율로 한 것은,
이것을 은사로써 받지 않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것을 은사로 볼 때,
안식일처럼 마음 즐거운 것은 없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휴식의 날은 아니다.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로서 이를 여호와께 드릴 수 있다면,
커다란 은혜이다.
혹은 수확의 십분의 일을 드리고,
혹은 노력을 바치는 등,
이는 모두 대 은혜이다.
그리고 또 7일 중 하루를 내어,
온전히 이를 여호와께 바칠 수 있음은,
더욱 큰 은혜가 아닌가!
여호와께서 과연 6일분에 대하여,
7일의 급료를 주시는지 아닌지를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정당하게 일한 자 누구나가 아는 것은,
노동에 대한 보수의 과다이다.
사람의 욕망에 제한이 없다고 하지만,
6일에 대한 7일분의 보수는,
이는 노동상의 법칙이 아닌가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현재,
안식일을 확수하는 스코틀랜드 또는 뉴잉글랜드(New
England-미합중국 동부의 6주-제1권 317p
참조)
등의 실황을 보면,
얼마쯤 생각이 가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 고장에 있어서는,
안식일에는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교통기관은 운전되지 않으며,
점포는 폐쇄되고,
기적 소리는 그치며,
대신에 회당의 종소리 은은하게 원근 서로 호응한다.
사람들은 천천히 일어나 의복을 새롭게 하고,
기꺼이 주의 날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껏 안식일 성수로 인하여,
사업의 차질을 가져왔다는 것을 들은 바 없다.
도리어 그 반대가 참이다.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 있어서 마저 안식일 성수자가,
생존경쟁의 우자로 됨의 실례는 결코 적지 않다.
안식일은 실로,
은사이다.
특권이다.
그리고 이 제도에 관한 최초의 기사가 즉 이 장이다.
(내촌감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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