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화락(和樂)
출애굽기 18장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서부터, 허다한 위험에 조우하고, 허다한 실험(체험)을 했다.
홍해의 횡단이 있었다.
만나의 하사가 있었다.
르비딤의 장막치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 후에 모세가 시내산에 들어가, 불과 연기 사이에서 십계를
받은 일, 장막 회생(제사) 등의 제도를 정하는 중요한 기사가 있다.
지낸 일을 회고하면, 은혜이다. 전도(前途)를 생각해보면, 희망이다.
일은 여기서 일단락을 고하고, 또 새로운 발전을 하려하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여로는 중간이고, 잠시의 휴가가 있었다. 광야(황야)에 있어서의
아름다운(좋은) 단란이 있었다.
그 기사가, 즉 출애굽기 제18장이다.
마치 저 오라토리오에 있어서 긴장의 가곡 다음에, 반드시 중간 휴식이라는
것이 있어, 누구나가 해득할 수 있는 평이한 곡을 연주하고, 그런 후에 장대한 노래로 옮기는 것과 같은 일이다.
출애굽기 제18장을 하나의 독립한 기사로 볼 때, 그 가치는 많지가
않다.
그러나 이것을 전후의 고조된 사건에 있어서의 한 에피소드(episode
삽화, 또는 악곡중의 주제 사이의 부분)로 볼 때, 또 절로 버릴 수 없는 취미와 깊은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언제나 이것을 전체로서 읽어야 할 것이다.
모세는 앞서 미디안 땅에 도망하여, 제사장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아, 두 아들을 얻었다.
(출애굽기 2:15-22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후에 여호와의 명하심을 따라, 애굽에 귀환하려는 도중, 혹은 재난이
모세에게 임하여, 십보라는 이것을 무서워하는 나머지, 그 아들에게 할례를 하게 했지만,
(4:24-26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아직 잘 모세를 이해하지 못하여, 잠시 동안 부부가 떠나 있었던 것이리라.
그런데 지금 모세가 백성을 인솔해 가지고서 십보라의 향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온 것을 알고, 장인 이드로는, 돌려보내어 집에 와있던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의 천막(진 친 곳)까지 만나러 온
것이다.
(이드로는 아마도 십보라의 오빠였으리라. 아버지의 이름은 르우엘이었다. 그리고 르우엘은 이때 아주 노령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에
있어서는, 아내의 아버지와 오빠를 가리키는데 같은 말로써 한다. 그러므로 이드로를 모세의 아내의 오빠로 보는 것은, 가장 자연적인 해석이다.)
그리고 그 회견의 광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극히 간곡(간절)하다.
이드로가 먼저 모세에게, 그 처자를 데리고 온 뜻을 말하니, 모세는
기쁘게 나가 장인을 영접하여, 절하고 이에 입 맞추고, 서로 안부를 묻고서, 함께 천막(장막)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6-7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
7) 모세가 나가서 그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맞추고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사실 있는 그대로이면서, 눈앞에 보는 듯하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께서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셨는지, 어떻게 하여 오늘날까지 놀라운 이적에 의해, 모든 간난에서 구원하셨는지를 말하니, 이드로는 크게
그 은혜를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8-9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
9)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이것도 역시 그럴 수 있는 사실이다. (이상의) 일은 모세의 일신에
관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상 아무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사건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여기에 써넣은 동기는 어디에 있는 것이었을까?
생각건대 모세는,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거의 하나님처럼 생각된 위인이었다.
앞에서는, 그가 산꼭대기에 서서 손을 들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아말렉과의 싸움에 승리했다고 한다.
후에는, 여호와께서 그와 대변하여 말씀하시고, 산에서 내려온 때,
그의 얼굴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로 인간 아닌 것 같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 모세도 이렇듯 가정의
단란에 있어서는, 보통의 정을 가진 심상(평범 ordinary)한 인간이었다.
그도 역시 우리들의 한 사람이었다. 그도 이 세상의 관계에 있어서,
약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도 역시 우리들과 한가지로 가정의 열락이 있었다. 또 그 고통이 있었다.
이후, 백성 모두 그에게 거슬리고 홀로 형매 두 사람만이 그의 친구였는데,
그 두 사람도, 또 마침내 그의 아내의 일로 말미암아, 그에게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상당히 인내심 강한 모세도, 견딜 수 없어, 노를 발했다고
한다.
실로 위인 모세도, 결코 이 세상과 인정을 초절한 특수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방에서 맞아들인 자기 아내(처)에 대하여, 형매 모두 원망을 발할 때의, 그의 고통은 얼마나 했을 것이랴! 한층 더 잘 이것을 추정
할 수가 있다.
사천 년 전의 위인에게도, 우리들과 같은 고통이 있었다. 또 같은
위로가 있었다. 몇십 만의 국민을 인솔하여 가지고, 애굽에서 나와, 광야(황야)를 방황하기 이미 수개월, 그의 어깨에는, 절대 한 책임이 있어서,
언제나 그를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뜻밖에도, 구활의 처자와 우연히 서로 만나(해후상봉),
광야(황야) 가운데서, 가정의 단란을 맛본다. 모세의 심서(심회; 마음속 회포) 가히 알만하다.
생각컨대 그는 후세, 사람들이 쓸데없이 그를 특별한 위인으로 삼아,
보통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처럼 오해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 한 장면의 가정적 기사를 여기에 삽입한 것이나 아닐는지!
이드로는 다시 번제(제1권 142p)와 희생(제물)을 여호와께 가져오고,
아론 및 이스라엘의 장로들 모두 와서, 함께 하나님 앞에서 먹었다는 것이다.
(12-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이는 즉 감사제이다. 남편의 집과 처가가, 서로 가까이 하고, 친목
하는 것은 아주 바랄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행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모세는 여기서 처남(혹은 장인)과 함께 감사제를 드린 것이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면서, 좋은 교훈이다.
이드로는 또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아주 번로(번거롭고
수고스러움)의 일임을 걱정하여, 동정하는 나머지, 하나의 재판제도를 진언했다.
즉 천인조, 백인조 오십인조, 및 십인조를 만들고 사건의 대소에 따라,
각조 자체에서 이것은 처리하고, 최대 사건만을 모세 앞에 제출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는 아마도, 이드로의 나라에 있어서 행해진 제도였으리라. 그리고
모세는 이 제도를 채용하여, 번로를 더는 일(줄이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들 기사를 읽고서, 그저 보고서만 넘길 수 없는, 하나의 중대사가
있다. 모세가 이것을 써 남긴 것은, 결코 단순히 그 환희를 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기사가 가르쳐주는 바는, 모세 일생의 신고(고생)에
대하여 보답한 사람은, 누구였는가에 있는 것이다.
고래로 이스라엘에 충실한 자로서, 모세와 같은 이는 없었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그 일생을 바쳤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위해 무엇을 했던가? 처음에 국인(동족)을
구하려한 그를 쫓아내어, 유랑의 생애를 보내게 한 것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처를 준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의 미디안인이었다.
40년의 황야(광야) 생활 중 오로지 그에게 향하여, 원망할 줄 알고, 그를 위로할 줄 모른 자는, 이스라엘이었다.
아론, 미리암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거스른 때가 있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자기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모세 위해 아주 적은 근소한 것도 갚는 바가 없었다.
그를 돕고, 그를 위로한 것은 이방인이었다. 이는 어찌할 수도 없는
사상의 사실이다. 유대인이 오늘날 구약성서를 펴서 읽을 때, 한 마디의 변해할 수도 없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스데반이 타는 듯한 열변을 가지고서, 이스라엘을 통책한 까닭도
또한 이것이었다.
애국자, 국민에게 용납되지 못하고, 도리어 이방인에게 영접된다. 이는 어느 세상, 사회에 있어서도 변함없는 일이다. 홀로 모세 뿐은 아니다.
그에 잇따른 참된 애국자는 모두 그러했다. 엘리야도 그러했다.
그는, 정의를 부르짖고, 도리어 국민의 배척하는바 되어, 사르밧(열왕기상
17:9-; 누가복음 4:26에는 사렙다)의 마을(촌)에 이르러, 가난한 과부에게서, 그 식물의 반을 나누어 받아 구조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그러했다.
이스라엘은 그를 용납하지 않고, 도리어 이방인 중에서 신자를 얻으셨다.
바울 같은 이도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같은 일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교회를 위해 진력하는 것은, 교회에서 배척되어, 교회 이외의
사람에게서 위로되는 것이다.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자는, 국인에게서 버림받고, 타국인에게 구조되는
것이다.
무릇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낸 자는 모두 그러한 것이다.
그들의 동정자가 되고, 위로자가 되는 것은, 인종을 달리하고, 사상을
달리하는 타인이다.
이러므로, 적어도 모세와 유사한 지위에서는 깊이 깨닫는 바가 없어서는
안 된다.
사람 위해 애쓴다든가, 나라 위해 애쓴다는 것은, 결코 그것이 특별하게
사랑할만한 것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명하심을 입어, 어찌할 수 없이 된 까닭이다. 애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인 혹 내게 보답할 것인가, 혹 내게 보답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내가 물을 바는 아니다. 문제는 이익의 교환이 아니라, 명령의 준봉이다.
경제학이 가르쳐주는 quid pro quo(대가)의 원리가 아니라,
모반자 위해 더욱 애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인생의 깊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뜻하지 않았던(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위안을 주신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조한 자가 은혜를 잊어버린대도, 또 감사하여, 이것을
위해 진력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자는,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백합을 입은 것은, 결코 그들의 공적에 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이를 택하신 것이다.
이는 즉 여호와의 자유로우신 은혜이다. 모세가, 그들 위해 진력한
것은, 조금도 이스라엘에 대한 보상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여호와의 명령에 따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스라엘로서 만약 그것을 자각한다면, 그들은 충심에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두터운(돈독; 돈후) 동정으로써, 모세에게 보답해야 할 것이었다.
이드로가 모세의 번로를 보고, 그 육체의 건강까지도, 생각해준 것
같이, 이스라엘은 모세의 일신상의 사사로운 일에 이르기까지도, 그 노고를 더는데 힘써야 할 것이었다. 순정한 동정은, 언제나, 이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모세에 대하여, 이 동정으로써, 보답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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