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1일 토요일

르비딤의 장막 설치


르비딤의 장막 설치

출애굽기 17 반석에서 물이 일과 아말렉의 격퇴로써 유명한 .

이스라엘의 회중은, 광야를 떠나, 여로를 거듭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다고 했다.

비하히롯이라, 마라, 엘림이라, 이라, 또는 르비딤이라는 등등, 대개 출애굽기 중의 지명을 특기한 것은, 모두 우연한 일은 아니다. 모두 장소에서 중대한 이적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특별한 은혜가 임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잊으려야 잊을 없는 경험을 기념하기 위해, 지명으로써 이것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생애에 있어서도, 어느 시대라고 하여, 지명으로써, 당시의 경험을 깊이 기억하는 일이 많다.

타인에게 있어서는 무관계의 단순한 지명을, 구원된 개인 또는 국민에게 있어서는, 무한한 감사를 불러일으킬 만한 (환기할) 은혜의 대명사이다. 마치 사람의 이름을 듣는 때에, 사람에게 모든 정신을 상기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르비딤도 역시 이러한 의미() 깊은 장소의 하나였다.

르비딤의 사건은 마라의 그것과 비슷해 있다. 물의 부족이었다. 그리고 백성은 또다시 원망(불평) 했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할 없는 까닭에, (성지) 전하는 모세에 대해, 자주 원망하는 것이다.

이는 어느 세상(시대) 있어서나, 변함없는 신자의 가지 특징이다.

하나님의 명하심에 의해, 자기를 인도하여, 죄의 세상에서 구출해낸 자에 대하여, 그들은 도리어 원망하여 말하는 것이다.

당신에게 인도되었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환난은 나를 찾아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후에 가나안땅에 들어가기까지에, 번이랄 없을 정도로 허다히 원망하는 말로써, 모세를 괴롭혔던 것이다.

시내반도는, 동서 220마일, 남북은 200마일, 너비와 길이는 거의 우리나라(일본) 규슈(구주-일본 본주의 서남쪽에 있는 ) 맞먹는(어슷비슷한) 건조 황막한 땅이다. 이러한 토지() 있어서는, 물은 생명이었다.

사마리아의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께서 길러오는 여인에게 향하여, 생수에 대해서 말씀한 같은 일도, 물에 부자유한 토지임을 알고서 일층 깊이 의미를 깨달아 있는 것이다.

르비딤에 있어서 백성의 갈증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거의 절망적 태도에 빠졌다.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하는 것으로서 족하게 여기지 않고 돌로서 그를 치려고 했다.

그렇지만 신앙 있는 모세는 역시 은혜가 임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앞에서는(먼저 번에는) 식물이 없어서 하늘에서 만나가 하사되었는데, 이제는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실 것인가!

여호와는 모세를 부르셨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을 데리고 모세의 손에 잡은 지팡이로써, 호렙의 반석을 치게 하셨다.

지팡이는, 잠시라도 모세를 떠난 없는 것이었다.

이것으로서 그는 미디안의 들에서 양을 사육(feed)했다.
이것으로써 그는 홍해의 물을 치고, 길을 열었다.

그리고 보라. 이제 또한 지팡이로써 바위를 치니, 거기서 잇달아 철철 반석의 물은 솟아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백성의 원망은, 없이 되었다.

마치 여름철(하계) 우리나라 농촌에서 살상 소동까지 빚어내는 격렬한 물싸움도, 밤새의 소나기(취우(驟雨) a shower), 융화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러한 일은 과연 사실일까 아닐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일본에도, 중국에도 드물게 있는 것은 아니다.

도후꾸셍(동북선) 모도미야역(일본 동북지방 복도현의 중앙부, 군산시의 북방지점) 1(한국의 10리에 해당) 남짓한 곳에 하찌만따로(팔번태랑) 반석수(석청주-이와시미즈)라는 물이 있다.

요시이에(의가), 오슈(오우슈우 오주) 정벌의 길가에서, 한발(旱魃) 고생하는 , 끝으로 돌을 찌르니, 솟아났다는 것이다.

르비딤의 반석에서 솟은 물도, 이런 유였을지?

그렇지만 르비딤의 기사는, 이것을 만나의 하사, 또는 홍해의 횡단과 함께 합쳐서 읽지 않으면 된다. 아니, 사람의 모세가 다수의 백성을 인솔하여 가지고서 광야(황야) 나온, 전체의 기사와 떼어서 이것을 생각할 수는 없다.

실로 출애굽의 사실, 그것 자신이 전적으로 이적(기적)이다.
르비딤의 같은 것은, 대이적(大異蹟) 중의 소이적일 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신앙이다. 건조무미한 토지를 걷는 , (맑은 clear water) 솟음에 조우한 실험(경험) 가진 자는, 르비딤의 기사를 의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고린도전서 10 4 참조).

그리고 경우에, 모세가 손에 잡고서 바위(반석) 지팡이를, 그리스도로 해석한다면, 굳은 바위는, 딱딱한 경우이다. 황막한 나날(매일) 생애이다.

세인은, 일상생활의 건조무미함을 견딜 없는 것으로 여겨, 판극, 제례 등으로써 오락의 기회를 삼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다. 그에게 있어서는,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 잠들기까지의 매일의 생활 그것이, 환희와 감사와의 연속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까닭이다. 그리스도를 가지고서 굳은 바위를 치는 때에, 청량한 감로수가, 바위 같은 생애에서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굳은 바위(반석) 그리스도로 해석할 것인가?

실로 그리스도는 치요(간대; 천세; 천년) 경과한 우리들의 반석이시다.
이를 두드려(찾아) 생명의 (생명수) 주어지지 않는 일은 없는 것이다.

어쨌건, 곤란한 경우에서 우리를, 구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그에게 의뢰하는 자는 실망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어떠한 궁경에 빠진데도, 은혜는 위에서, 또는 아래에서 임해 오는 것이다.

식물이 없어진 ,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오고, 물이 없어진 , 반석에서 맑은 물은 솟아났다.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우리들 그를 믿는 자의 실험(체험)이다.

르비딤에 있어서의 사건은, 이것으로 다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아말렉인의 공격을 받았다.

아말렉인은 아라비아인의 일종으로서, (민첩하고 사나운) 표한한(ferocity) 전쟁을 좋아하는 백성이다. 이후 번이나, 이스라엘을 괴롭혔으나, 마침내 다윗에게 멸망되었다.

르비딤은 이스라엘 아말렉의 싸움의 단서였다.

이때, 모세의 나이 팔십, 아론은 팔십셋이었다. 훌도 또한 노년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싸움을 젊은 여호수아에게 일임하고, 자기들 삼인은 기도하기 위해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은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모세의 () 무거워지자(피곤해지자), 아론과 훌은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모세로 하여금 위에 앉게 하고, 사람은 이편에서, 사람은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었기 때문에, 해질 (일몰)까지 손이 내려오지 않고, 마침내 여호수아가 칼날로써 아말렉을 쳐서 파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명한 기사로서, 실로 귀한 교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우리들이 기도로써 사람을 도울 있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세의 기도가 계속 되는 , 이스라엘은 이겼다. 기도 그것에, 실제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학문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 오십 헉슬리, 틴들, 스펜서(1 9p 참조) , 빈번히 그리스도교를 조소했다.

드디어 어느 , 신문지상 도전을 시도하여, 같은 정도의 병자 사람을 놓고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그리하여 기도의 결과 어떠한지를 시험하려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것은, 무엇보다도 명백한 일이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기도의 능력()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소년시절, 그는 방종하여 악행을 그치지 않아, 어머니 모니카는 깊이 마음을 애태우면서, 아들을 위해 열렬한 기도를 드렸다. 악행이 더욱 더하여 기도도 더욱 통절을 가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령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르러, 왕년의 방탕아는 일변하고, 신앙의 챔피언(champion 용사)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도, 후일에,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것은, 어머니의 기도이다라고.

그는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하는 기도의, 위대한 힘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도는 실로 (능력)이다.

단순히 아니라, 부단히 남을 위해 기도하는 , 놀라운 힘은, 아는 자만이 안다.

나도 역시 번인가 신앙이 약해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있을 있음은, 확실히 어느 사람인가, 위해 모세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돕는데 금전의 공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위를 주선해 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손을 들어 끊임없이 그를 위해 기도하는 , 이는 최대의 원조이다.

이스라엘은 모세에 대하여 원조(기도) 감사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오늘날 물질주의의 사회에 있어서는, 기도는 아주 염가의 것이 되었다.
사람은 곧잘 기도한다 하면서도, 실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로엘(로웰), ()중에서, 상처한 슬픔에 대한 친구의 기도를 사양하여 말의 자선을 사절한다 말하고 있다. 이는 염가의 기도를 배척한 말이다.

기도는 실로 형식의 것은 아니다. 단순한 감정도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일 있는 유일한 (능력)이다.

신자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가 이기느냐 지느냐, 사느냐 죽느냐 싸움하는 것을 보고서, 좌시 없어, 손을 들어 기도하지 않을 없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을 없어,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써 가장 귀한 것은 이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체험)에서 기도를 제거할 것인가? 남는 바는 실로 전무이다.

그렇지만 때로 기도할 마음도 없어지려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세의 손은 무거워져(피곤해져), 번이고 내려지려 했다. 그때 아론과 훌이 곁에서 그를 붙들었다.

우리들도 그래야 것이다. 기도가 끊기려고 하는 , 옆에서 이를 격려하면서 함께 기도해야 것이다.

기도는 (능력)이다. 산꼭대기에 있어서의 모세의 기도에 의해 이스라엘은 아말렉에게 이겼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없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들은 모두 싸움에 승리할 있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모세의 손은 자주 내려지려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손은 영원히 내려지지 않는다. 그의 기도 있음으로서, 우리들의 승리는 확실하다.

우리를 치려하는 아말렉 사람은,

가정에도 있다.
관공서에도 있다.
사회에도 있다.

이와 싸움에 있어서, 자기를 돌아다보면 언제나 패배의 염려가 있다.

그러나 하늘에 있어서, 우리 위해 기도하시는 크신 모세(그리스도) 생각하는 때는, 필승을 기대하는 외에는 없는 것이다.

연약한 소녀가, 가정과 싸워, 이를 정복하는 같은 실례는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 같은 것도, , 사십 전의 처참한 상태에서 어쨌건 오늘의 지보를 차지하기에 이른 것을 생각하면, 기어이 어디엔가 이를 위해 기도한 있음을 믿지 않을 없다.

그리스도교 종국의 승리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기도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여호와께 의뢰하는 이스라엘에 대적한 아말렉인에 대해서는, 여호와께서 대신하여 싸우셨다. 그러므로 아말렉은 멸망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거슬리는 자의 멸망은, 4 간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등이 나와서, 바벨론, 앗수르, 애굽의 멸망을 예언한 것은 마치 오늘에 있어서, 런던(London) 황폐해져 들이 되고, 베를린은 올빼미의 서식처가 되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광적인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호와께 대적(반역) 자는, 사실 멸실 것이다. 하나님께 의뢰하는 신자를 괴롭히는 자의 운명도, 역시 정해져 있다.

신자는 이것을 생각하여, 인내함과 함께, 그들을 위해 동정해야 것이다. (내촌감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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