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1일 수요일

만나의 하사


만나의 하사

출애굽기 16


2 불평도 치료되었다.

이스라엘의 회중은, 엘림을 떠나, 광야로 나갔다. 애굽을 나선 때부터 이미 달째 되는 15일이다. 데리고 오던 소와 양은, 거의 이것을 도살하여,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은 소지품의 허전감을 느끼지 않을 없었다. 당시에는, 현금보다는 비옥 풍요한 땅이었던 듯하다.

서아시아 일체의 땅은, 지금은 건조한 사막이지만도, 옛날은 그렇지는 않았다.
이해(1 78p 참조) 통하여 북빙양에서 인도양까지, 수로가 서로 접속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만한 증적이 있다. 이해의 물고기 중에 북빙양의 것이 있고, 갈릴리 호수에는, 나일강산과도 흡사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어쨌든 3 전인 애굽시대에는 시내반도 등도, 오늘보다는 습기가 많은 토지였던 듯하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은 역시 황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거기에 몇십만의 사람을 육양 있는 자료란, 물론 찾을 가망도 없는 것이었다. 휴대물은 이미 없어지려하고, 대용할 것은,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실망했다. 그들은 번째 원망(불평) 소리를 발했다.
실로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불신의 백성만큼 구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그들은 고난이 자기 몸에 임하는 , 하나님은 자기를 구원해야 의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바다 저편 비하히롯에 진친 이래, 원망하고서는 구원되고, 구원된 후에 원망하고, 원망에 원망을 거듭하여, 그리고서도 부족히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3-)

지금에 이르러서도, 애굽의 생활을 회고하고, 이것을 사모하고 있는 것이다. 애굽은 본래 식료가 풍부한 토지이다. 생활이 용이한 국토이다.

어떤 사람의 계산에 의하면, 우리나라(일본) 화폐의 16 있으면, 훌륭히 자식 하나를 양육하기에 족했다고. 이로써 일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이스라엘은 안락한 생활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도리어 광야에 있어서의 자유의 생애로 인도된 것을 잊어버리고, 노예생활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기 가마 곁에 앉아 향기 높은 파와 청파(scallion) 곁들여, 싫증나기까지 () 먹을 있다면, 여호와께 인도되는 자유의 생애보다도, 바로에게 수종하는 노예생활을 즐길 것이라는 것이다.

실로 무기력도 이만저만이 아닌 가련한 자의 원망이다. 그것도 되풀이하기를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모세가 만약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이었더라면, 방언했을지도 모른다.

너희가, 만약 그렇게도 애굽의 고기를 사모한다면, 이제부터 발뒤꿈치를 돌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라.

실로 그도 자연의 정에서 그들을 질책하여 했다.
우리가 누구관대(우리를 누구로 여겨)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7-)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택한) 그릇()으로써, 백성을 인도하는 사역자에 지나지 않는다. 원망의 목표가 되어야 이는, 그들은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의 원망은 실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다. 그러나 모세, 아론은 인내 깊은 교도자였다.

그들은 백성 위해 여호와께 기도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몸소 응답을 해주시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12-)

그리고 저녁에는 많은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사면에 있던 이슬이 마르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메추라기는 땅을 나는 소조로써, 가을마다 아프리카 내지에서, 사막과 바다를 건너, 시내반도에 돌아오는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광야에 찾아드는 무렵에는, 날개 아니라, 몸까지 피로에 지쳐, 이것을 손으로 잡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다.

다만 아침에 지면에 놓인 작고 둥근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타마리스크(tamarisk 위성류-식물)라고 하는 종려나무를, 벌레 같은 것이 찔러 생기는 분비물(배출물), 그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우리나라(일본) 소위 송로류가 그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타마리스크의 분비물은 도저히 상식에는 적당하지 않고, 육일동안은 많이 내리고, 칠일에는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고 보면, 송로라기도 어렵다.

필경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특수한 식물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이적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15-)했다는 것이 있다.

이것이 무엇이냐, 히브리어로 마느(NT manna)이다.
만나이다.

혹은 이것은 은사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아라비아어로 은사라는 말은, 말과 거의 비슷한데가 있다.

이것은 무엇이냐, 혹은 이것은 은사이다, 그것이 만나이다. 놀라운 은사에 대하여, 절로 발해진(생긴) 말이다. 실로 아름다운 말이다.
이러한 만나가 40 동안이나 계속하여 내려 이스라엘인을 양육했다는 것은, 학술상 해설 불능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상의 실험(체험)으로 , 깊은 진리가 중에 담겨져 있다.
신앙의 생애에 들어선 자는 모두 공급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가 자기 손으로써 일하는 때라고 해도 이는 그가 스스로 일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일할 있게끔 하여 주심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로는, 일하는 손까지도 부숴버리신다. 생계의 길은 모두 끊기고, 친구로부터는 버린바 되고, 소유물은 없어지고, 가족은 병상에 눕고, 최후의 푼까지도 남겨 없이 되고, 이미 달리 의지할 데마저 아주 없이, 오로지 기도로써 한밤을 새우려는 때에, 생각도 못했던 은사가 임해오는 있음은, 많은 성실한 신자가 실험(경험) 일이다.

그때, 그들은 다만 놀라,
이것이 무엇이냐 외치는 밖에 달리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은, 실로 순수한 은사이다. 그리고 신자가 이런 은사에 의해 사는 일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실험을 사람은 시내반도(6, 107p 참조) 있어서의 만나의 하사를 듣고, 괴이히 여기지 않는다.

이는 이상한 같으면서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양육하시는 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서, 음식물에 핍절(궁핍)함의 걱정은 그치는 것이다.

사람을 괴롭히는 , 생활문제 만한 것이 없다.

칼라일(1 182p 참조) 말했다. 근세인의 지옥은 빵의 부족이다라고.

현대에 있어서 먹을 없다 것은, 공복 이외에 여러 가지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때의 최량의 무기는, 이것이다.

어떻게 하여 먹고자 하느냐.

그렇지만 애굽을 나온 자에게는, 하늘로 부터의 만나가 주어진다는 것을 믿고, 우리들은 위로 받는 것이다. 일하지 않으면 먹을 없다는 것만이 진리는 아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천부께서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25, 31-33)

종국의 진리는 여기에 있다. 광야에 있어서의 만나의 하사는 실증이다.

*내촌감삼의 주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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