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일 일요일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홍해의 횡단
출애굽기 14

이스라엘은 마침내 애굽에서 나왔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13:21-)

옛날 사막을 여행하는 때는, 선두에 커다란 횃불을 켜든 사람이 앞서 갔다. 이는 사막은 바다와 마찬가지로, 안계의 끝까지도 목표를 정할 없음으로써,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불꽃을 울려, 그리하여 방향을 지시했던 것이다.

특히 200만의 대중(대세) 인솔함에 있어서는, 필요가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구름 기둥, 불기둥 그것은 반드시라고는 없대도, 예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를 인도하심이 특별한 일이다. 실로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였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끝없는 사막의 하늘에, 연기가 높이 춤추며 올라갈 , 지팡이를 손에 모세를 필두로, 아론, 여호수아, 갈렙 , 이에 따르고, 다시 잇달아 이스라엘의 민중 200, 부녀 있고, 노유 있고, 가축 있고, 뒤섞여 진행하는 모양이란, 마치 이는 폭의 활화이다.

지난날 미국 뉴욕에 있어서, 군비확장 시위운동을 위해, 15 명이나 되는 사람이, 정연한 계획 하에 순서를 바로 하여 진행한 , 곳을 지나는데, 전후 시간을 필요로 했다고 한다.

하물며 모세가 인솔한, 일대 군중의 사막 여행의 곤란은, 이것을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는 이적(기적) 없이는, 도저히 성취할 없는 일이다.

과연 여기서, 커다란 이적이 일어났다.
장소는,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바알스본 맞은편(14:2-)에서였다는 것이다.

믹돌은 어디인가? 비하히롯, 바알스본은 어디인가?
그것은 지금 없다.

겜뻬이 세이스이끼에 기록되어 있는, 도우까이도우의 지명이 겨우 700 후인 오늘날, 이미 없어져 찾을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출애굽기 기자는, 어쨌든 지명을 주저하는 일없이 명기한 것이다. 당시 이것을 읽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곳이 어디였는지 명백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특별한 이적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적을 기록하기 위해서 먼저 지리적으로 장소를 밝힌 것이다. 이는 이적의 사실을 확신하고, 자신이 기사의 책임을 지려하는 아니고서는, 하지 않는 일이다.

이적이 만약 기자의 상상에서 것이라면, 있는 지명을 밝히기를 피했으리라. 그러나 몸소 실험(체험) 거친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일은 잊어도, 은혜가 있었던 장소는, 이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디의 어디라고 명확하게 단언치 않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광명의 실험(체험) 자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들 중에는, 자기가 구원된 일시까지 명확하게 제시(표시) 있는 이가 있다.

그렇다. 이는 이적이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풀이하려 , 허다한 난문을 낳고, 드디어 없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역사적으로 풀려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신앙의 사실로써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신앙의 사실로서 이를 , 많은 명확한 진리가 중에 담겨져 있다.

신앙적인 해석은, 도리어 역사상의 난문을 푸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바알스본 맞은 바다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14:1-2 참조).

이는 이스라엘인이 예상했던 길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나안에 이르는데, 아마도 가까운 해안의 땅을 동으로 진행해 상상했으리라.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셨던 것이다.

방향을 바꾸어 남으로 나가라.

믹돌은 홍해 서안의 고원이리라.
이스라엘인이 곳은 전방과 우편은, 고원이었고, 좌편은 바다였다. 삼면이 막히고, 다만 후방의 한길이 열려 있을 . 그들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곳에 장막을 쳤다.

어찌 생각인들 했으랴! 후방의 일로로부터 바로의 군세가 추격해 줄이야!

이스라엘은 진퇴, 여기서 벽에 부딪혔다. 그들은 실망하지 않을 없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여 말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4:11-12)

그렇지만 모세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신앙이 있었다. 그는 대답하여 말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14-)

그리고 그의 기도는 드디어 응답되었다. 동풍이 불어, 바다는 마르고, 이스라엘은 무사히 이를 건넜다. 그들을 추격하던 애굽인은, 중도에서 해수로 뒤덮이고, 모두 멸실되었던 것이다.

이는 신앙상의 실험(체험)이다. 우리들은 스스로 가까운 길을 취하여 나아가자 하는 ,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들에게 명하여, 바다와 믹돌과의 사이, 바알스본에 대한 비하히롯 앞으로 나가라고 명하신다.

가서 보면, 궁경이다. 인력으로서는 어찌할 없는 궁경이다. 그때, 자칫하면 우리는 소리 내어(외쳐) 말한다.

최후는 역시 멸망이다. 이런 것이라면, 차라리 불신자로서 행복하게 지냈을 것을하고.

그러나 모세의 신앙 있는 자는, 여기서 소망을 잃지 않는다.
인력이 모두 다한대도, 이는 모든 (능력)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니, 인력이 다한 때는, 하나님은 가장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특별사신 방법으로서 길을 여시는 것이다.

크롬웰(1 39, 121p 참조) 싸운 던바-(Dunbar) 전투가 일례였다.

그의 군대는 자루 속의 쥐였다. 군대는 모두 실망했다. 그러나 다만 크롬웰만은 실망하지 않았다.

구원은 반드시 오는 것이다. 밤이 밝기 전에 길은 반드시 열리는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의 기도는 실현되었던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막다른데 이른대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지는 일을 아지 못한다. 사람은 모두다 절망의 소리를 발하며 멸망을 기다리는 때에, 신자는 모세와 가지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리니, 우리는 진정해 있을 것이다라고.

신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소위 대로 되겠지하고, 체념(단념)하지 않는다.
또는 부딪쳐 부숴라 하면서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그는 다만 가만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다.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이사야 30:15-)

그때 동풍은 풀기 시작하여, 새로운 길은, 해중에서 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만하게 궁경에서 구출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교훈이다. 깊은 위자(위안)이다.

우리들의 최후의 생애가 끝나, 바야흐로 죽음이 다가온 때가, 이것이다.

의사도 우리를 도울 없고, 처자 친구 역시 어찌할 없고, 앞에 가로 놓여 있는 것은, 죽음의 홍해이다.

언젠가 번은, 이것을 건너지 않으면 된다. 오늘 그것을 생각하면 차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신앙 있는 사람에게는, 때에도 길이 열리는 것이다. 더욱 은혜에 감사하면서, 새로운 구원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혹은 죄의 자각이 아주 세차게 솟구쳐 올라(불타서), 고민오뇌 억누를 없어, 침식을 잊고서 해결을 구한대도 이를 얻지 못하고, 타인의 위자(위안) 내게 있어서 바람이 마음에 스치는 것과 같은 것일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어찌할 수도 없는 , 생각하지도 않던 곳에 길은 열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게 나타나 보이고, 무서운 죄의 고통은 모두 제거되는 것이다.

기타 혹은 가난에 쫓겨 아사하게 ,
혹은 만인이 나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

신자는 항상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의 손은 반드시 그에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떠한 궁경에 빠진대도, 후퇴할 줄을 모른다. 그는 다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때에도 나아가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14:15)

앞으로 전진하라, 이는 실로 좋은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표어이다.

그리고 이때

구름 기둥도 앞에서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르러 서니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편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14:19-20)라고 했다.

이스라엘인에게는 (광명)으로 보인 구름 기둥이, 애굽인에게는 흑암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적이라면 있는 것으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있으리라. 그리고 우리들의 실험(체험), 뜻을 푸는 것이다.

우리들을 위해서는, 빛이요, 위자(위안)이신 생명의 반석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이 세상 사람에게는 위태로운(의심스런) 것이며,
조롱거리요, 거치는(장애의) 돌이다.

우리를 비추어 인도하는 , 그들에게 있어서는 도리어 암흑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가 아니라, 철학이었다면 어떠할까? 세상 사람도 이에 가까이 하리라. 그리고 우리들은 종내 그들을 떠날 수가 없으리라.
오직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린도전서 1:18 참조) 되는 십자가이기에만이, 우리들은 애굽에서 구원해 있는 것이다.
홍해 횡단의 정신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한 것이 고린도전서 10 1-2절이다.

우리 조상들이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침례란 무엇인가?
구름의 인도 있고, 바다의 인도 있어, 그리하여 마침내 애굽에서 떠나, 모세와 하나(동체) 것이다.

이에 의해 애굽과 이스라엘과의 사이에 커다란 거리가 가로놓인 것이다. 장엄한 물의 침례에 좋은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참된 침례는, 구름과 바다의 경험이다.

일단 궁경에 빠져, 마침내 세상에서 떠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다.

홍해의 횡단, 이는 참된 침례이다. 이것을 하기까지는 우리들과 세상과의 사이에 연락이 그치지 않는다.

실험(체험) 거친 , 우리들은 세상에 돌아갈 없고, 애굽은 다시 추격해 없으며,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없는데 이르는 것이다.

신자의 복은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 획을 그은(획한) 홍해의 횡단은, 신자의 생애에도, 역시 하나의 신기원을 그어야 침례이다. (내촌의 글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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