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30일 목요일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의 성수


출애굽기 20 8-10(마가복음 2 27-2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육축이나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애굽기20:8-10)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2:27-28)

안식일의 성수는 십계명의 1개조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해, 사람에 대해, 사람이 지켜야 중요한 의무의 하나이다.
이것을 깨뜨림은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만큼의 죄라는 것이다.
무릇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니라(21:14)고까지 성서는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의 성수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얼마만큼 중요한 것이 있었는지는 지금 사람이 예상조차 없는 일이다.

우리는 사람은 어찌하여 우상을 신으로 섬겨서는 되는지를 안다.
우리들은 사람은 어찌하여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되는지,
어찌하여 사람을 죽여서는 되는지,
어찌하여 간음해서는 되는지,
어찌하여 도적질해서는 되는지,
까닭(이유) 안다.

그렇지만 어찌하여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되는가?
그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이 두터운 , 소행이 바른 자는 적지 않지만,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는 아주 드물다.
그들은 생각한다.

안식일의 성수는, 이는 이스라엘 백성 위에 특별히 설정된 제도로써, 인류전체에 미칠 것은 아니다. 십계 , 일개 조만은 일반에게 적용될 것이 아니고, 따라서 구약의 폐기와 동시에, 효력을 잃은 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들은 안식일을 대하기를 다른 날처럼 하고. 이날에 이세상의 업무에 종사하며, 이날을 유희(recreation)위해 소비하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십계명은 그렇게 해서 완전히 깨뜨려질 바의 것은 아니다.
십계는 사람이 지켜야 가장 중요한 의무의 10개조를 명시한 것으로써, 하나를 깨뜨림은, 전부를 깨뜨림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안식일의 성수가 중에 것은, 중에 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깊이 구명하지 않고서, 조항을 등한히 하는 것은, 신앙상 또는 도덕상 매우 위험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한다.

거룩히 지키라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이것을 사용하라 것인데,
물론 일주간 어느 날도 신성한 것이고, 7일만이 특히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업무의 대부분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거의 전부가) 자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7일에 1일을,
특히 하나님 위해 사용하라는 계명이, 가장 실제에 적합한 것임을 수가 있다.

사람이 일주 칠일을 모두다 성일로 삼는 일은 가장 바람직한 것이지 만도, 그러나 7일을 기억하지 않는 자는, 대개는 날을 다른 날처럼 되게 하는 것이다.

안식일의 성수는 모든 날을 거룩케 하는데 필요하다. 그리고 조항이 십계 중에 넣어진 목적의 하나는, 사람의 생애의 성화에 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성수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예배 위해 바친다 것은 아니다.
날을 그렇게 해석하는 까닭에, 많은 사람은 안식일 성수의 계명을 가볍게 보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것은,
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위해 사용하라 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위해 사용하라는 것은, 자기 이외의 사람 위해, 하나님과 타인 위해 사용하라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논쟁한때, 구약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를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태복음12:7 참조) 하신 그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하나님을 예배한다 것은, 참된 의미에 있어서,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있는 것이다.

예배, 일면에 있어서는, 확실히 하나님을 제사하는(받들어 모시는)일이다.

그러나 다른 방면에 있어서는, 사람에게 자비(긍휼:인자) 베푸는 일이다.
자비는 제사의 내용인 것이다.
예배는 신앙의 주관적 상태이고, 자비는 객관적 실현이다.
그러므로 자비(긍휼: 인자) 떠나서, 진정한 예배는 없다.

하나님께 쓰이려하면(섬기려 하면), 사람에게 쓰이지(섬기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중요한 일면에 있어서는, 사람에게 자비(긍휼; 인자) 베푸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안식일 성수의 계명이 특히 십계 중에 넣어진 주요한 목적이 긍휼 시행에 있음을 잊어서는 된다.
그러므로 성수의 설명으로써, 다음 말씀이 더해진 것이다.

너와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육축이나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애굽기20:10 참조)

안식일은, 특히 이것 노동자에게 안식을 주어야 날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이는 자신의 휴식을 위한 날은 아니다.
자기 아래서 일하는 자의 휴식을 위한 날이다.

이날은 이것 특히 하나님께 드려야 날인 것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자기 아래 있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한 날이다.
이날에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고, 남종이나, 여종이, 또한 우리 형제자매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쉬고, 그들도 우리와 함께 쉬며,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모여,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그리하여 새롭게 자타가 동체임을 기억해야 것이다.

안식일 제도는 인류적 관념 양성 위해 마련된 것이다.
고용주와 고용인이 서로 분리하지 않게끔 하려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형제적 관계를 보존하기 위해, 사회평화를 위해 상하 공동일치를 위해, 제도는 마련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여 안식일에 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해득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마가복음2:27-28 참조)

말씀은 물론 예수를 믿는 자는,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예수의 성어를 해석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라고 하지 않을 없다.
예수는 구약의 율법을 깨뜨리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안식일의 제도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예수는 안식일을 폐하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지키게끔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안식일은 특히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서로 친교할 있도록,
상하의 격절(사이가 멀어져 연락이 되는 )없도록,
사회에 평화가 행해질 있도록 하렴에서,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을 잊어버리고, 사람은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은혜의 제도로 하지 않고서, 그의 권위에서 나온 속박의 율법으로 해석하는 까닭에 혹은 어떤 이유 하에 이것을 폐기하고자 하고, 혹은 바리새인이 행한 같이, 이것을 백성에 강요하여, 즐거워해야 날을 커다란 속박으로서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음으로써,

십계명 십조 , 조항만이, 특히 은혜하사의 성질을 것임을 수가 있다.
이날은 이것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가 특히 그의 지으신 사람과 짐승을 축복하시기 위해 마련하신 ,

사람에 있어서는 그가 하나님을 본받아(따라서) 자기보다 낮고,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돕기 위해 마련한 날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7일에 쉬셨다는 것은, 특히 은혜하사의 시기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피로의 결과, 무위(아무 일도 않음) 휴식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아니다.

참된 안식은, 긍휼시행의 쾌락이다.
하나님께 있어서, 또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에 지나는 안식은 없다.
안식일은 평화의 날이다.

이날에, 경쟁은 그치고, 애린은 행해지고, 존비의 구별은 없어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 같이 그의 자녀로 된다.

안식일은 그의 정하신 평화의 날이다.
그것도 1년에 다만 1회의 평화 일은 아니다.
7일에 1회의 평화 일이다.

인류의 평화는 그렇듯 번번히 이것을 기억함의 필요가 있다. 인생의 고통의 백분의 구십구까지는, 사람은 모두 형제자매라는 것을 잊는데서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말을 바꾸어 한다면,
7일에 1,
지상에 있어서, 천국에 있어서와 같은 생애를 시도하라는 것이다.

나라에 임하게 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날마다의 기도를, 7일에 1 실제적으로, 지사에서 시험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들 각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계명인가를 묻지 않더라도 분명하다.
평화는 모든 성공의 기초라는 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께서 안식일 성수의 계명을 십계명 중에 넣으신 깊은 뜻의 얼마를 미루어 수가 있다.
일가의 평화를 꾀하려는 .
사업의 성공을 바라는 자는, 은혜의 계명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였느리라(출애굽기20:11 참조) 말씀이 있으므로,
그가 인생을 축복하신 것을 있다.

반대로

무릇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을지(니라) (출애굽기31:14-) 있음은, 하나님의 기분에서 나온 위협의 말씀이 아님을 있다.

이는 천연의 법칙이라고 해도 차지 없다.

죽일지니라 말은, 스스로 멸망할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다.
안식일은 지키지 않을 ,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신앙은, 매우 소멸하기 쉬운바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지 않고 그는 이욕일방으로 달리기 쉽고, 따라서 그의 사업은 매우 무너지기 쉽다.

그러므로 안식일 성수를 가지고서, 그의 선민됨의 표적으로 삼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애굽기31:12-13).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의 제자 됨의 표징도 또한, 우리들이 그를 본받아 안식일을 지킴에 있어서이다.

사복음서는, 예수께서 어떻게 하여, 성일을 지키셨는가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1) 예수- 제자와 함께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시장함을 면하셨다(마태복음12:1-9; 마가복음2:23-28; 누가복음6:1-5).
(2) 예수 - 안식일에 한편 마른 자를 고치시다(마태복음12:10-13; 마가복음3:1-6; 누가복음6:6-11).
(3) 예수 -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에서, 38 병자를 고치시다(요한복음5:1-16).
(4) 예수 - 안식일에 실로암 못에서, 나면서 소경 사람을 고치시다(요한복음9).
(5) 예수 - 안식일에 회당에서, ( 팔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고치시다(누가복음13:10 이하).
(6) 예수 - 안식일에 고창병 사람을 고치시다(누가복음4:1-6).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출석하여(모여) 하나님을 예배함과 동시에, 그날에 사람을 도우시고, 안식일 성수의 실례를 보이셨다.

예수의 제자 자는, 그를 본받아, 예배와 선행으로써 성일을 축하해야 것이다.

만일 안식일에 발을 금하여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길로 행치 아니하며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조상 야곱의 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이사야58:13-14).

7일에 하루 일을 쉰다고 해서, 세상의 경쟁에 염려는 조금도 없다.
아니, 정반대가 사실이다.

끊임없이 일하는 자는 잘못 일하는 자이다.
때는 쉬고서만, 사람은 일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때껏 안식일의 휴업을 단행하고, 세상 사업에 있어서 실패한 있음을 알지 못한다.
7일에 1 마음을 씻고, 몸을 휴식케 함으로써만이, 사람은 언제나 심신의 신선을 간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안식일의 성수는, 신앙 위해서만 필요한 아니다.

위생 위해, 또는 사업 위해 필요하다.

영국의 정치가 비콘스필드공이 말한바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은혜 중에 안식일 제도 같은 것은 없다.

실로 깨닫고, 이를 행한다면, 그가 말한대로 라고 생각한다.

(내촌감삼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