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제7조
출애굽기 20장 14절 : 간음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라’(너 간음치 말라-일역)
이 말은 매우 좋지가 않다. 그 여운은 귀에 아주 불쾌하다.
일찍이 뉴욕(New York)에 있어서의 유명한 장로교회 목사가, 내게 말했다.
‘십계명 제7조(제7계명)는, 이것을 공개석상에서 강론하지 않음이 좋다. 왜냐하면, 많은 나쁜 암시를 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이 말에,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조의 연구는 극히 긴요하다.
왜냐하면, 이 계명이 가르치려 하는 바는, 가정의 신성에 있기 때문이다.
‘간음하지 말라’,
이것을 환언하면, ‘네 이웃의 가정을 존중하라’이다.
생명의 귀함을 알 때, 비로소 살인죄가 중한 것임을 안다.
그처럼, 가정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때, 비로소 간음에 관한 계명이 내려진 연유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생명에 대해서 알지 못함과 한가지로,
가정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역시 매우 천박하다.
가정 즉 ‘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숙박소인가?
재산의 소재지인가?
근친의 집합소인가?
이들 조건에 의해 ‘홈’의 관념이 다 설명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비스마르크가, 어느 때 감탄하며 말한바 있다.
‘영국인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 홈(home)이라는 말, 즉 이것이다’라고.
실로 ‘the home’은 영어 특유의 아름다운 말의 하나이다.
홈은 어떤 특별한 institution (제도)이다.
이중에 적어도, 하나의 신성한 관념을 포함하는 것이다.
홈은 단순한 집은 아니다.
또 오락의 기관은 아니다.
또 생활의 본거는 아니다.
이들 각종의 요소를 별도로, ‘홈’에 하나의 결여해서 아니 될 조건이 있다.
무엇인가? 말한다면,
그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일, 이것이다.
남편 있고,
아내 있고,
아들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노인 있고,
혹은 이국인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 모든 중심으로 하나의 주가 있다.
즉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가장은, 이를 대표하고,
주부는 이를 도우며,
두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 가족에게 나누고,
일동 모두가 하나님을 높이 섬기는 곳,
거기에 참된 ‘홈’이 있다.
그러므로 ‘홈’은 가장 엄격함과 동시에,
또 가장 자비 깊은 곳이다.
견고하기 무쇠 같고,
아름답기 꽃 같은 곳이다.
참된 ‘홈’이 어떠한 것인지는,
이것을 실견치 못하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면 ‘홈’은 어디에 있는가?
‘홈’은 본래 이스라엘에서 시작하고, 크리스천이 이를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홈ㆍ스위트ㆍ홈(home sweet home)이라는 것은,
지상에 이때까지 그밖에 나타난 일이 없다.
구약성서는 일면에서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홈’의 역사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서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홈’역사이다.
만약 타국의 역사일 경우 어떤가?
정치와 전쟁과 문학과 철학과 법률과 외교와의 역사는 있으리라.
그렇지만, 한 남자가 한 부인을 사랑하고,
한 부인이 한 남자에게 쓰이어(섬겨),
모두 함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홈의 역사는,
어디에서 이것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시험 삼아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나라조 또는 헤이안조시대의 ‘홈’을 묘사한다면,
과연 어떠할 것인가?
우리 국민이 애송하는 하꾸닝잇슈의 가집 중, ‘홈’의 파괴자가, 얼마나 많은가 보라.
그리고 이것은, 다만 우리나라 뿐만은 아니다.
그리스(희랍), 또는 로마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중에 있어서 홀로 이채를 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성서는 냉담한 도덕서는 아니다. 아름다운 ‘홈’의 이야기(설화)이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깊이 그 아들 이삭을 사랑했던가?
그(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그 남편에게 섬기기를 얼마나 충실히 했던가?
그들은 어떻게 하여 그 아들을 위해 아내를 맞았던가?
아브라함의 종은, 왜 멀리 그 고국에 보냄을 입고,
기이한 섭리에 의해 우물가에서 물 길러 온 소녀 리브가를 만나, 이를 주인의 아들의 아름다운 짝(가우)으로 택하여, 금귀고리와 손목거리를 리브가에게 주었으며,
그리고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던가?
또 이삭이 어떻게 저물 때 들에 나가, 낙타를 타고 오는 그녀를 맞이하고,
이를 자기 어머니(사라)의 장막으로 인도했던가? (창세기 24장),
거의 이런 기사를 엮어 놓은 것이 성서이다.
성서 그것 중에 소설 이상의 소설이 있다.
성서가 우리들에게 진정한 ‘홈’을 제공하는 것이다.
성서 있는 곳에 ‘홈’이 있고,
성서 없는 곳에, 아직 진정한 홈이 있었음을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귀하고도 아름다운 것은 ‘홈’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거룩한 사랑의 결합이다.
재산도 명예도 ‘홈’의 귀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만약 누구인가 이 은혜를 해치는 자 있을 것인가?
그 손해는, 죽음으로써도 이를 보상할 수가 없다.
이웃의 ‘홈’을 파괴하는 죄는,
다른 무엇을 파괴하는 죄 보다도 중대하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간음하지 말라’고.
즉 이웃의 ‘홈’을 파괴하지 말라 이다.
‘간음’을 이처럼 해석할 때, 그 의미는 아주 명백하다.
간음이란, 단순히 음행을 말함은 아니다.
십계명 제10조(제10계명)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있는 대로,
‘탐냄’은 ‘도덕질’의 의지적 방면으로서,
제10조는, 제7, 8 양조를 보다 근본적으로 경계한 것이다.
즉 안다. 도적질하는데 물건 있고,
사람 있는데, 이웃의 아내, 또는 남편을 훔치는 것은,
훔치는 죄 중의 가장 무거운 것임을,
그리고 여기 말하는 소위 ‘간음’은, 즉 이런 종류의 가해적 죄악이다.
이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께서 받은 가장 신성한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웃의 아내를 훔치지 말라.
그 남편을 훔치지 말라.
부부된 자의 거룩한 사랑을 파괴하지 말라.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
‘간음하지 말라’고.
역사는 이 의미에 있어서의 현저한 실례로 창 있다.
예컨대 몽가꾸 죠닝은 미나모도의 아내, 게사(게사고갱)을 사모하고,
다까시는 시오노야 다가사다의 아내를 훔쳤다.
트로이왕 프리암의 아들 파리스는, 스파르타(라코니아 Laconia주의 수도로,
고대 그리스, 즉 희랍의 최강의 도시국가) 왕 메넬라오스에 객이 되었을 때,
그 아내(헬레네)를 빼앗아 돌아온 데서, 마침내 유명한 트로이 전쟁(주 5, 6, 7 참조)을 불러일으키고, 그리스 전토 연합하여, 트로이를 공격하기 10년이 미쳤다.
그렇지만 간음의 가장 좋은 실례는 성서 중에 있다.
이것을 범한 것은 다윗 왕이다.
그는 자기 배속하의 장교,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욕보인 후,
고의로 우리아를 격전장에 보내어 전사케 하고,
그리고 밧세바를 빼앗아, 자기 아내를 삼았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실로), 솔로몬의 어머니였다(사무엘하11-12장),
증오해야 할 간음의 죄는, 역사상 결코 드문 것은 아니다.
과거에 있어서 그렇다. 현재에 있어서 역시 그렇다.
누가 이 죄를 역사상의 유물로 삼는가?
왕년(past years)한때 구주(Europe) 인사의 흥미의 중심이 되었던 소설이 있었다.
저자는 북구의 문학자로서, 그 묘사한 바는 명백한 간음이었다.
즉 어떤 사람이, 타인의 아내를 사모하여, 그것이 도저히 이룩되어서는 안 될 연애 위해,
분투 노력하여, 마침내 목적을 달했다는 사실을 노골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한 죄악의 기사가, 소설로서 또 연극으로서 수다한 신사숙녀의 상관하는 바로 된 것이다.
그들은 말했다.
‘그것이 나쁜 줄은 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묻는 바는 선악이 아니다. 불가능사의 수행에 나타난 사람의 의지력이다’라고.
그렇지만 그들은, 그 소설을 읽고 그 연극을 보고서 과연 단순히 의지력만을 느꼈을 것일지? 그들은 실은, 말을 교묘히 하여 간음죄를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유명한 유럽(Europe)의 사회주의자자 막스ㆍ노르다우의 저서 《허례》같은 것도 그 일례이다. 그는 말했다.
‘문명사회에 가장 많이 행해지고 있는 허위는 결혼이다’라고.
도 근래의 소위 과격주의자 중에도, 놀랄 사상이 있다.
과격파는 허무당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허무당의 시조로 불리 우는 미켈ㆍ바쿠닌은 고백하여 말했다.
‘미신의 첫째는 신이다. 둘째는 권리, 셋째는 법률, 이르기를 무엇,
그리고 다음으로 결혼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종생 속박되어 있는 일 같은 것은 최대의 착오이다’라고.
그들은 가정을 저주하고, 이것을 파괴하려고 힘쓰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은 다만 저 사회주의자에 한정된 사상일까?
오인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정을 염두에 두지 않는 풍조는, 바야흐로 오늘날 전 사회에 미만하고 있는 병폐이다.
일찍이 미국의 독서계를 휩쓴 ‘제8년째’라고 하는 소설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교육 있는 부인이, 결혼 후 8년째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결혼은 그 맨 처음에 있어서는 아주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기 시작할 무렵부터 조금씩 번거롭고 귀찮음(a nuisance)을 느끼고, 마침내 8년째에 이르러, 그것이 파괴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다’고.
그리고 이 책이 많은 사람에게 애독되었던 것이다.
가정을 염오할 속박의 곳으로 여기고,
가령 타인의 남편, 또는 아내일지라도, 진실로써 이를 사모하기만 한다면,
무슨 나쁜 데가 있으라고 하는 등의 사상이, 근래에 특히 교육 있는 사회에 스며들고 있음(침윤함)을 본다.
금년 1월 우리나라(일본)에 있었던 어떤 불상사에 대하여,
전국의 동정 흡연하여, 경주되고 있음은, 무엇을 나타내 보임일까?
일은 십계명 제7조의 명백한 파괴의 폭로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상하의 동정을 모으는 일이란 실로 기괴지극이다.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가정은 그 근저부터 파괴되어가고 있다.
이때에 있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필요함은,
삼천 오백년 전의 이스라엘에 있어서와 무엇 다를 바 없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5:28-참조)고.
간음죄도, 역시 살인죄와 한가지로, 그 본원은 심중의 부패에 있어서이다.
그러므로 이 죄에서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들의 정이 성결하게 됨을 필요로 한다.
정육을 게을리 하고, 이 죄의 확청을 기대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 청년 남녀의 정을 성결케 할 수가 있을까?
이는 부형이 신중히 강구해야 할 대 문제이다.
본래 우리나라 사회의 풍습 중에는, 정육을 막는(해치는) 것이 매우 많다.
복장 같은 것, 음악 같은 것, 독서물 같은 것, 모두 그러하다.
순결한 그리스도교적 가정에 있어서 청년에 대한 두 개의 금물이 있다.
그 하나는 관극이다.
사람들은 혹 말한다.
연극 반드시 불가하지 않다. 햄릿도 맥베드도 모두 극이 아니냐고.
그렇지만 많은 가정 파괴가 극장에서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
청년의 정육상 관극이 결코 장려할 것이 아님은, 무엇보다도 확실하다.
그 이는, 소설이다.
소설에도 역시 좋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이름으로 허다한 굳건한 가정이 파괴된 것을 안다면,
자녀의 손에 소설을 맡기는 위험스런 일은 하지 못하리라.
극이라든가, 소설이라든가, 그 중에 드물게 위대하고, 선미한 것이 있을지나,
결국 그것의 net result(결과)는 십계명 제7조의 죄에의 유도이다.
그러므로 고래로, 많은 모범적 가정에는, 반드시 엄정한 반면이 있었다.
조나단ㆍ에드워드는, 그 신학의 엄격함을 가지고서 알려진 이다.
그는 말했다.
‘회개치 않는 자는, 어린아이라도 지옥에 들어가리라’고.
그의 이 신학은, 오늘날 이미 버려져 돌보지 않는다 해도,
그의 자손으로서 계수되는 2,500의 미국인 중, 다수의 유력한 설교자,
또는 문학자, 또는 변화사, 부대통령, 사장, 시장 등, 사회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신사를 낳았을 뿐 아니라,
그 중 이때까지 한 사람의 범죄자를 낸 일이 없음의 사실은,
무언가의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자녀의 정육상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그 적극적 방법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가정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일,
그로 하여금 각자의 심중 가장 깊은 곳에 거하시게 하는 일, 이것이다.
가장도, 주부도, 자녀도, 복비도 모두 그의 세력에 복종하고,
그가 기뻐하시는 바의 일만을 행하도록 힘쓰기에 이른다면,
가정은 엄격함과 동시에, 따뜻한 곳으로 되어, 마음속으로부터의 웃음소리가
자주 그 중에서 나오게 되리라.
그리고 상쾌한(깨끗한) 쾌락이 이에 따름 있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감사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되고 보면, 관극도 소설도 이미 청년의 마음을 끌지 못하고,
십계명 제7조의 죄에서 피하는 일도, 곤란치 않게 되리라.
정(情)을 깨끗이 하고, 가정을 성결케 하는 유일한 길은 나사렛 예수를 영접하는데 있다.
정육(情肉)과 함께, 부형의 중대한 책임에 속하는 것은, 자녀의 결혼 문제이다.
이 한 가지를 잘못하여, 사랑할 남녀를 지옥 불에 던질 위험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에 있어서, 그 곤란과 위험이란, 일층 심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각별히 부형된 이는,
기도로써 그 자녀 위해 귀한 짝을 구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그 행복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육과 매개(서로 맺어줌)는, 십계명 제7조에 따르는 실제문제로서,
부형이 고려해야 할 중대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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