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의 해석(상)
출 20장
십계명은 구약 성서의 중심점이다.
그 절정이다.
여호와의 훈계는,
여기에 괄약하여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후에 두 장의 돌판에 새겼다는 것이고 보면
(출 3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깍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이 긴 문구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학자는 연구 결과 십계의 진수가 다음 열가지 말 decalogue에 있음을 발견했다.
1. 너는
내 안전에서
나 외에는
아무것도 신으로
삼지 말라.
2. 너는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함부로)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이를
거룩히 지키라.
5.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6. 너는
살인하지 말라.
7. 너는
간음하지 말라.
8. 너는
도적질하지 말라.
9. 너는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
10. 너는
그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그리고 간결한 히브리어로는,
이상의 각조는,
모두 몇 마디 말로써 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보아 그 어조의 굳셈을 이루어 알만한다.
기타의 말은 십계의 주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십계는 이를 2분하여 두 장의 판에 기록 구분되었다.
즉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다.
기타는 사람에 대한 계명이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하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5-39)’고
십계명은 실로 이 두 가지로 전부인 것이다.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고 십계명의 첫째에서 네째까지는,
분명히 여호와에 대한 계명이다.
단 제 5계명은 어떤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이는 과연 그저 사람에 대한 계명일까?
아니,
부모에 대한 의무는,
동시에 또 하나님께 대한 의무이다.
부모를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이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도덕과 동양 도덕의 차는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 조항도,
또한 하나님에 대한 계명의 하나로서,
돌판의 첫장에는 이 계명까지가 기록되고,
그리고 제6계명 이하가,
둘째장에 기록되었으리라.
1. 너는
내 앞에서
나 외에
아무 것도(그 무엇이든)
신으로 삼지
말라.
‘내 앞에서’, 즉 ‘나와 상대하여’이다.
여호와께서는 어찌하여 다만 ‘너는 나를 하나님으로 알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필경 옛날 애굽, 그리스,
로마 등 참신을 인정치 않는 일은 없었다.
그 의미에 있어서 모두 일신교(1권 316,
317 참조)였다.
다만 위험한 것은, 제2, 제3의 신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인은 말했다.
쥬스는 참신이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를 경배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기타의 신도 섬겨 무방하다고.
같은 사상이,
애굽에도 로마에도 퍼져 있었다.
따라서 마침내 타국의 저속한 종교 관념을 취하여다 자기의 거룩한 하나님께 옮기기에 이르렀다.
아니,
다만 그들에게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또한 이것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참되신 하나님 만으로는 부족하게 여겨, 다른 신의 도움까지도 빌고자 한다.
그리고 소위 광량대도의 정치가들,
역시 애써 이런 경향을 장려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어찌 알리! 신앙의 무너짐은 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일찍이 순수한 신앙을 가졌던 자가, 후에 미온적 신자로 타락하는 것은, 모두 이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나와 상대하고
아무것도 신으로
삼지 말라’고.
그리고 이 계명을 엄수해 온 것은, 다만 유대인뿐이었다.
춘추 사천년,
백성은 흥했다가 백성은 멸망했어도,
홀로 이스라엘은 멸망치 않는다.
이번의 전쟁(제1차세계대전)의 종국 후, 가장 융성의 운으로 향할 것은 구미의 강국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일 것임은 식자가 아는 바이다.
그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다. 그들은 십계명의 제1계명을 엄수해 온 까닭이다.
여호와 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려 하는 자가 있을 때는 그들은 생명을 걸고서 싸웠다.
왜냐하면 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
양보하는 것은, 신앙의 근저를 적수에게 맡기는 것과 같은 일인 것이다.
2. 자기
위해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
이것을 문자대로 해석할 때, 조각도 나쁜 일이다.
미술도 나쁜 일이다.
기념하기 위해, 사람의 상을 만드는 것도 나쁜 일이다.
유대의 역사상으로도,
그렇게 해석한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반드시 오류는 아니다.
상(象)은 그 종류가 무엇이든 물을 것 없이, 반드시 숭배의 의미를 동반한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숭배를 사람에게 바치는 마음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상(像)의 남용은 신앙 타락의 표징이다.
오늘날의 우리나라(일본)가 바로 그것이다.
너는 모든 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하여,
그것만으로 이미 깊은 진리가 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더욱 덧붙여,
‘이것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상을 만들어,
이를 섬기지 말라고.
이는 제1계명과 중복인 듯 하지만 중복이 아니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그 자신(자체)을 형상으로서 섬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다만 유대인 뿐 아니라,
만국민에게 통하는 사실이다.
사람은 혹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섬겨야 할
유형의 대상을
결여함이, 그 최대의
흠점이다. 왜냐하면, 이는 인심(人心) 자연(自然)의
요구에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우리들 각자의 경험에 있어서도,
때로 마음이 침울해지고,
기도하는 것 마저 곤란한 경우가 없는 것 아니다.
그러한 때, 적어도 십자가 만이라도,
이것을 섬길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실로 신앙 타락의 제1보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매,
예배하는 자도, 다만 영으로써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본래 보이지 않는 실재자이시다.
이를 형상으로 나타내려 해도 불가능이다.
우리들의 신앙은 일신교인 위에 영적(靈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에 특이한 성결의 능력은 실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또 너는 ‘자기를 위하여(너를 위하여)’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이는 주의해야 할 말이다.
우리들 육을 갖추는 약한 인간에게 있어서,
무형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그대로 섬기는 일이야말로,
매우 곤란한 것임을 하나님은 잘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심과 함께, 하나님께서 몸소 우리들이 섬겨야 할 것을 주신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도,
섬겨야 할 형상이 있다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질(본질)의 진상(참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분이시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5-19)
하나님의 성(신성)을 받아, 완전하게 성지(聖旨)를 실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형상인 것으로,
그를 제외하고 우리들은 달리 자기 위해 무슨 우상도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지금은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시다.
우리들의 신앙은 순연한 영적 신앙이다.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것을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라는 간단한 의미로 해석해도, 커다란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만약 어떤 이가, 입을 열기만 하면 반드시 하나님,
하나님 한다면 이는 깊은 신앙의 결핍을 증거하는 일인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경솔하게 그의 이름(거룩하신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신’이라고 하지 않고서 ‘그’라고 한다.
‘자네는 언제 그를 믿었는가’로서, 경건심을 잘 발로하는 것이다.
신으로 신God 이라는 문자를 남용하는 자로, 불신자가 아닌 이는 없다.
그 가장 현저한 예는 미국인이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할 뿐만이 아니다.
오늘날은 도리어 악사(惡事)흉사(凶事)를 나타내는데 이 말로서 하는 것이다.
깟댐유(God damn you. 신이 너를 저주한다)는 말은 그들의 상투 용어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는 그들의 환성(歡聲)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제한 당하는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고통이다.
신앙의 타락도 이에 이르고 보면, 다 된 것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계명의 정신은 그것만은 아니다.
보다 깊은 뜻이 있다.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마 5:33,
37)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서언(誓言)하는 것은, 성명(聖名)남용(濫用)의 최악(最惡)한 것이다.
물론 그 시초는 성실한 경건심에서 나온 것이리라.
마치 우리나라(일본)에 있어서의 기청문이 당초에는 아주 엄숙하게 확수되던 것과 같다. 그러나 기청문도 겜빠이 시대에는 거의 남용되고,
도꾸가와 시대에는 이것을 인쇄하여 팔기에 이르렀다.
실로 위험한 하나님의 이름에 의한 서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가르쳐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고.
우리들도 만약 무엇인가 약속하고자 할 것인가?
즉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남용치 말라. 특히 이것을 이용하여,
맹서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는 모든 신자에 대한 중대한 계명이다.
특히 감독, 목사, 전도자들,
직을 종교에 가진 자에 대한 대경고이다.
4. 안식일을
기억하여 이를
거룩히 지키라.
안식일을 ‘기억하여’란다.
알 것이다.
안식일은 율법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은혜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이는 명령의 날은 아니다.
은혜의 날이다.
사람이,
이것을 은사로 받지 않고 하나님께 대해 율법적 태도로 나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계명으로 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우리들이 잠시 노동을 쉬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소기의 목적을 다하도록 해야 할 날이다.
우리들의 배(방주)는 어디를 지향하여 바다로 나가, 지금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키 잡은 손(타수)을 멈추고,
대공(하늘)의 별을 살펴, 자기의 진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대목적에 따라, 항로를 바로 잡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게을리 하고, 다만 전심으로 항해를 계속한대도,
배는 뜻하지 않았던 항구에 도착하여 인생은 전연실패(全然失敗)로 돌아간다.
그 실례는 다 셈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안식일은 이러한 위험에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날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마저,
하루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이것을 회고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신 후, 다음 창조로 옮기셨다.
하물며 우리들 피조물에게 있어서랴이다(창세기 1,
2장을 보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하여,
하나님의 대표자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는 마음으로써 이에, 복종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 대한 의무임과 동시에,
또 하나님께 대한 의무이다.
여호와께 쓰이는 길의 최후이며,
그리고 인륜의 제1조이다.
그리스도교에 효도 없다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교의 효도는 단순한 대인(對人)도덕은 아니다.
부모에게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에 있어서는,
불효의 죄를 벌하는 경우, 돌로서 쳐 죽인 것이다.
이같이 보아오면,
십계명은,
완전한 교훈이다.
마치 일정한 장소를 포위하려고,
그 주위에 열개의 말뚝을 박아 놓은 것과도 같다.
그렇지만 이 열개의 말뚝은 가장 적절한 장소에 박에 놓여져 있다.
세상의 십계(다른 종교에도 십계가 있다)라는 것 중, 하나라도 모세의 십계에 비할 것은 없는 것이다.
이는 실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계명이다.
이것에 시내산 그것과 같은 장엄함이 있다. 귀할찐저!
(내촌감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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