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제10조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너희는 탐내지 말지니라’이다.
집이라 하고, 아내라 하고, 남종, 여종, 소, 나귀라고 하는 것은,
그 목적물을 열거한데 지나지 않는다. 십계명은 이 일조로서 최후인 동시에,
또 가장 심원(최심)한 계명에 달한 것이다.
‘탐함’의 뜻은 무엇인가?
보통 해석되는 바에 의하면,
함부로 취해 들이는 것을 ‘타 맨다’고 한다.
즉 한 가지 것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고,
다시 둘째, 셋째 것을 취하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탐낸다’는 말의 본래의 의의는 행위가 아니라. 의지이다.
행위를 낳는 마음이다. 이것을 ‘탐낸다’고 한다.
즉 ‘탐과 욕한다’의 뜻이다.
함부로 탐내는 일, 족하게 여길 줄 모르고, 탐망 하는 것,
그 의지를 일컬어 탐낸다고 하는 것이다.
영어의 ‘카빗 covet(남의 물건을 턱없이 탐내다)’ 역시 그렇다.
그 어원은 라틴어의 ‘쿠피두스 cupidus’에 있다.
타인의 것을 함부로 자기의 것에 되게 하려 하는 욕심을 말함이다.
신약성서의 원어인 그리스어에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다.
‘플레오넥시아 pleonexia(탐한다)’는,
‘플레오네코 pleonecho(더욱 많이 소유하려 한다)’에서 온 것이다.
즉 취득의 행위가 아니라, 취하려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알 수 있다.
십계명 제 십조는, 의지의 죄에 관한 계명이라는 것을,
이웃에 대한 의무인 제6조 이하에 있어서,
이웃의 생명과, 그 가정과, 그 소유물과 그 이름을 중히 여겨야 할 것을 가르친 후,
최후에 일조가 가하여 말한다.
‘네 마음에 그 마음을 품지 말라’고,
여기에 이르러 계명은 내적으로 되어, 보통의 법률이 묻지 않는 곳에 미치는 것이다.
모세율은 다만 사람의 행위를 물을 뿐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
그 의지의 성결을 요구한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마음이, 행위로 나온 경우이고,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은,
기타의 소유물을 탐내는 마음이, 행위로 나온 경우이다.
이 양조의 계명에 부가하여, 더욱 죄를 그 근본에 있어서 끊기 위해,
‘탐내지 말라’고 한다.
즉 그저 도적질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도적질하려는 욕심을 품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십계명 제6, 7양조에 대하여, 이 추가의 일조 있음에 의해, 우리들은 십계명 전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아는 것이다.
실로 ‘율법은 영적(신령한)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의 해석은, 영적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죄의 근원은 마음에 있어서 부터인 까닭에,
죄를 경계하고자 할 때, 마음에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십계명 제10조는 이것을 가르쳐 주는데 있어서 명백하다.
이는 율법의 이상을 명시하는 말로서, 구약에서 신약에의 과도이다.
이 일조 있음에 의해, 율법 그것이, 영환 된 것이다.
이로써 이 계명의 중요함과 그 심원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탐심의 죄가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 것인지는,
신약에 있어서의 예수 및 사도들의 가르치심에 의해 명백하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르시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누가복음12:15-)’고.
이것을 원어의 어세에 따라 말한다면,
‘너희는 주의하라. 탐심을 두려워해야 할 적으로 보고, 그 공격에 직면하지 않도록 주의하라’의 반복적 계고이다.
그리고 후에 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누가복음 12장 13절 이하 참조)고.
성서는 또 말씀하신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13:5-)’고.
즉 성서는 반면에 있어서,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로새3:5-)’고 하면서,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노예 되게 함을 경계함과 동시에,
다른 반면에 있어서,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대조하여,
그것이 전적으로 무요임을 가르치고,
그리하여 탐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본령에 어긋나는 까닭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적(敵)인 탐심을 삼감의 반면에 있어서,
커다란 평화와 만족이 있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더해 주시는 은혜로서 족하다는 것이 이것이다.
모든 죄의 근원은, 의지에 있는 것이다.
행위의 죄는, 이미 잉태된 의지의 죄가,
외부로 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의 죄인 탐심은,
다른 많은 죄와의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웃의 아내를 탐내고, 이에 맞추어 간음과 살인의 대죄를 범한 것은,
다윗이었다(사무엘하 11-12장 참조).
성서가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기술한 다윗 그 자신이,
최대의 죄인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또 하나의 복음을 전해주는 교훈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저 다윗까지도 사유(赦宥)되어, 하나님께 사랑을 입음의 길이 열렸다면,
우리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희망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또 열왕기상 제21장은 아합 왕이 가난한 자의 포도밭을 탐하고,
또 그를 죽인 기사를 싣고 있다. 탐심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다른 죄를 유발하는 동기이다.
탐람의 죄도, 역시 가장 흔한 죄의 하나이다.
그 누구나가 이것을 범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중 특히 상인 같은 이는, 입을 열면, 곧 탐람을 말한다.
특히 또 이것을 국가적 죄악으로서 볼 것인가?
한나라가 다른 나라의 영토를 탐내는 일은,
종래의 역사상으로는 거의 괴이히 여길 것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 된 자는, 이 죄를 말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에베소5:3-)’. 고 있음 같다.
그저 탐내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가지고자 함’그것이 이미 죄의 뿌리이다.
이웃의 물건을 부러워하여 이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곧 탐심으로 화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여자로서, 복음을 배우기를 원하는 나머지, 타인의 성서를 부러워하여, 마침내 이것을 도적질한 이가 있다.
성서까지도 그렇다. 하물며 기타의 것에 있어서랴!
타인의 지위를 부러워하여, 거짓 증거를 세우는 신사가 있고,
이웃의 토지를 탐내어 거대한 부를 만드는 회사가 있고,
상하빈부 할 것 없이, 넘실넘실하여 인심에 미만해 있는 것은, 실로 탐욕의 죄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아무런 욕도 품지 말아야 할 것인가?
아니, 바라는 마음이 허용될 수 있는 경우로서 적어도,
두 개의 것을 생각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지식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속한 만물을 탐구하려는 욕,
즉 이것이다.
그 이(二)는, 신앙욕이다.
더욱 거룩한 사람이 되기 바라는 욕, 즉 이것이다.
이는 의심할 것 없는 정당한 욕망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 마음속에(conception) 하는 생각이다.
가끔 지위 낮고 재산 없는 사람 중에 그 거룩함에 있어서는
실로 부러워 견딜 수 없는 이가 있다.
왕년(past years), 내가 미국에 있던 때, 어느 날,
사람에게 인도(동반)되어, 필라델피아 빈민가를 시찰한 일이 있었다.
그때 한 장님 흑인 노부가 있었는데,
나의 신앙상의 실험 담을 듣자, 자진하여 노방의 돌단에 올라가,
소리 높여 근린의 사람들을 손짓하여 불러다가, 그 환희를 나누려고 하는 것을 보고,
나도 또한 그러한 사람이었으면 하고 원한 것은, 어제 일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바이다.
그리고 이들 두 가지의 욕을 제외하고서, 우리들은 어떠한 소욕도 가져서는 안 된다.
무엇을 입으며,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그런 것에 대하여 모두 탐내지 말 것이다.
우리들의 구해야 할 것은, 다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이다.
그러면 모든 필요한 것은 더해질 것이다.
‘너희, 탐내지 말지니라’ 그렇다.
‘너희는 탐내지 말지니라’이다.
무욕(無慾)은 성서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적 생애의 일면이다.
무욕의 생애란다.
세상에 과연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실로 불가능한 것 같으나, 가능한 사실이다.
무욕은 가능이다.
우리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때에만 가능하다.
일찍이 어떤 이가, 나의 청년회에 있어서의 강연을 들은 후,
귀로에 뜻밖에도 제국 극장 앞을 지내고 나서, 곧 그 감상을 써서, 내게로 가져왔다.
이르기를
‘지금 나는 자동차를 몰고 가서 제국에서 노니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 부러워할 것 없을뿐더러, 자신의 환희에 비하여, 그들이 매우 불쌍한 자임을 알고, 이 은총을 그들에게도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한 데가 있다…’고.
나는 이 사람이 값싼 의복(조복)을 걸치고서 충실한 노동에 종사하며,
그리고 언제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기부를 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신사숙녀를 보고 미워하지도 않고, 부러워하지도 않고,
도리어 자기가 받은 은혜를 나누려는 그리스도적 심정에 대하여,
깊은, 동정을 금할 수 없다.
나 자신의 실험(경험)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도 일찍이는 타인의 지위, 또는 명예 또는 재산 등에 대하여,
때로는 혐오 또는 부러워하는 선망의 정에 견디기 어려운바 없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이것을 억제하려고해도 억제할 수 없고,
더욱 더 애쓰면(노력하면), 그럴수록 고통을 더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도리어 이 욕념을 근절케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거하시고,
참 생명이 내 속에 용솟음쳐 일어난 때,
나는 비로소 모든 욕념을 버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것인 이 천지가, 언제인가 우리들 그리스도인에게 기업으로써,
반드시 주어질 것을 안 때에,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충심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내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받은 이 지위를 그 누구와도 교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떠한 의복, 식물, 주택도, 나의 마음을 끌기에 족하지 못하다.
세상에 가장 복된 것은, 이 몸 그대로로써 그리스도에게 구원된 자신이다.
그러므로 또한 부러워하지 않는다. 새암(시기)하지 않는다. 미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게을러지는 것 아니다.
아니, 내 마음에 이 만족이 넘치는바 있어서,
눈의 소욕, 귀의 소욕, 육체의 소욕이 나를 방해하는 일없이,
따라서, 내 활동을 일층 왕성하다. 열렬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필수물로써 만족하는 자의 생애는
환희와 감사가 있을 뿐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요한복음1:17 참조)
모세는,
‘탐내지 말라’고 하여, 죄를 그 뿌리(근저)에 있어서 끊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을 부여주심으로써, 그 계명을 실행하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십계(명)는 십계로써 실행할 수 없고, 그 제 십조는 십계 그것의 불완전을 표명한다.
그렇지만 복되다. 이 불완전을 보충하여,
십계를 실행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임한 것이다.
십계명의 이상은 영적 성결에 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은 십계명 제10조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실행케 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십계명 제10조는, 실로 구(舊), 신(新) 양약의 연결 줄이다.
최후로, 모세의 십계를,
시험 삼아 불교의 십계와 비교할 것인가,
곧 전자의 가치가, 일층 명백함을 안다.
이제 불교의 십계 중 가장 흔히 행해지는
사미(155p 참조)의 십계와 보살(155p참조)의 십계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미십계 사미 또는 보살십계에 대해서는 본권 출애굽기 강의 십계 해석하의 부기 참조(155p).
①불살계 ②불도계 ③불음계 ④불망어계 ⑤불음주계 ⑥불식육계 ⑦불사견계 ⑧불훼계 ⑨불방계 ⑩불기광계(속일광)
보살십계 ①-④는 앞의 것과 같다. ⑤불첨주계(섞을첨) ⑥불설과죄 ⑦불자찬훼타계 ⑧불간계 ⑨불진계 ⑩불방삼보계. 즉 안다.
불교십계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씌일지를 가르치는 바 없고,
또 한마디도 부모를 공경해야 함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 조항은, 모세의 제9조의 분해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의 십계가 귀하지 않은 것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넓고 커다란 심원한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모세의 십계가 훨씬 우수함은,
누구 나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실로 그 높음은 하늘 위에 닿고, 낮음은 땅속에 달하여, 포우주적이다.
그리고 이에 더 함에 그리스도의 복음 있어,
도덕상에 서서 도덕을 실행할 수 있게끔 한다.
율법은 위대하다. 복음은 보다 위대하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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