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제5조
출애굽기 20장 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조소하는 자는 말한다.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
부모에게는 불효, 임금에게는 불충, 그리고 국가적 관념의 개무, 이것이 즉 그리스도교이다’라고.
세상의 많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사상을 가지는 것은, 실로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천만에!
그리스도교의 근본인 모세의 십계명은, 그 일조로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싣고, 더구나 이것을 두 장의 돌판 중 첫째 중에 속하게 하여, 부모를 공경하는 의무가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하나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네 하나님께 대하는 마음으로서 네 부모를 섬기라’고.
이렇게 가르치는 그리스도교는, 과연 불효불충의 종교인가? 혹은 말한다.
‘그리스도교에 효자 없다 이는 그리스도교 그것이 효도를 결여하고 있음의 한 예증이다’라고.
나는 대답하여 말한다.
‘어찌 우리 국어에도 충효라는 글자를 갖고 있지 않는가’고.
그 문자 없는 것만 가지고서 그런 가르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영어에 효라는 자 없어, 부득이 Filial piety(자식으로서의 효도)라는 말로 이에 해당시키고 있지만도, 그 어세 약하여, 도저히 우리 국민에게 있어서와 같은 ‘효’의 사상을 나타내기에 족하지 못하다.
특히 pious(부모공경, 경건, 신경전)라는 말 등, 소위 신심이라 칭하는 조롱의 의미로 쓰이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일자를 창작하여 filiality라하고, 이로써 효라는 글자에 해당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어에는 실지로 효라는 자가 없는가?
‘피티 piety’(라틴어의 pietas) 그것이, 효 또는 충을 나타내기에 족한, 깊고, 귀한 말이다.
모든 어른에 대한 경애 공순을 일컬어, piety라고 한다.
그러므로 효도도, 충군도, 애국도, 모두 이 한마디 가운데 포함되는 것이다.
이 자를 가벼운 뜻으로 해석하기에 이른 것은, 가끔 신앙타락을 표명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영어에 효라는 자 없다는 것은, 잘못이다.
효도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봉사(service)로서 교시되고,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진정한 그리스도교 국민 사이에 중시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다.
성서에 있어서 ‘부모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자녀를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부모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모든 조선(祖先)을 일컬어, 역시 아버지라 하고, 어머니라 한다.
’예컨대
‘너희들의 아버지 아브라함’
또는
‘우리들의 아버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든가, 혹은
‘아브라함의 자식으로서 다윗의 자식인 예수 그리스도’(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한글역) (마태복음1:1-)’라든가,
또는 ‘너희는 사라의 자식이로다’(그의 딸이 되었느니라-하늘역) (베드로전서 3:6-)고 한 것 등, 모두 그 실례이다.
히브리인의 말로서, 부모란, 부모 및 조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것은,
동시에 ‘네 조선을 공경하라’는 뜻을 포함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자기 위에 있어서 자기를 지도, 또는 지배하는 자도, 역시 이를 아버지로 불렀다.
정의와 자비에 찬 제왕왕후를 일컬어, 국부국모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시적 호칭이 아니라, 사실을 표명하는 말이다.
그 의미에 있어서 , 다윗, 솔로몬, 기타의 제왕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였다.
또 사제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 말을 쓰는 것은, 성서가 명시하는 바이다.
요한 1서 2장 중에서 ‘아비들아’, ‘청년들아’, ‘아이들아’라고 한 것은, 한집 (일가)의 부자를 가리켜 말함이 아니고, 사제를 의미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한마디 말 가운데,
단순히 낳은 부모에 대한 경애뿐 아니라,
우리들을 지배하는 주권자 및 우리들의 영혼을 인도하는,
스승(사부)에 대한 외경의 의무도 포함하는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환연하면,
‘모든 어른에 대함이 경애로써 하라’이다.
그리고 노인에 대한 존경은, 성서가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의 하나이다.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19:32-)’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아버지에게 하듯하며……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디모데전서5:1-2)’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언 16:31-)’
솔로몬 왕이, 그 어머니가 자기에게 이른 때, 일어나 영접하고 이에 절한 일 같은 것(열왕기상2:19-),
또 부스사람(욥기주석참조) 엘리후가 연장자를 어려워하여, 자기의 의견의 개진을 참고 있던 일등(욥기32:4-6),
모두 같은 것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이에 반하여 세상의 타락의 한 특징은,
윗사람에게 대한 존경심의 쇠퇴, 노인에 대한 청년의 교만이다.
‘아이가 노인에게……교만할 것이며……(이사야서3:5-1)’
어째서 연장자를 공경해야 할 것인가?
모든 노인 또는 어른은,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소리(음성)를 우리에게 전해야 할 자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정신의 연원은, 실로 이에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공경하라’는 것은 어떠한가?
소위 ‘경원’이라고 하여, 경이라는 자를 천박한 형식적 경례의 뜻으로 사용하기에 이른 것은, 인심의 대 타락을 보임이다.
‘공경한다’는 말은, 본래 매우 무게 있는 뜻(의의) 말이다.
영어로 이것을 honour이라고 한다.
하나님께 대하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서, 충심으로 경애하고, 외경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한다(요한복음8:49-)’고.
‘높임 존’ 즉 ‘공경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으로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경제(계명)이다.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길게 하려 함이라)’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그 보상으로 장수할 것이라는 뜻인가? 혹 그러리라.
그렇지만 부모에게 효한 자 반드시 장명 하는 것 아니고, 불효자 반드시 단명 하는 것 아니다.
육체의 생명의 장단을 결정짓는 것은, 홀로 도덕문제만은 아니다.
유전(201p참조), 또는 위생상태 등도 곁들여 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네 생명이 장수하기 위해서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내가 연구한 한에 있어서, 최상의 설명으로 인정해야 할 것은,
이것을 국민적으로 해석하는데 있다.
즉 효도를 중시하는 국민은, 오래 그 땅에 존재하여, 번영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이제 가나안땅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향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따라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란,
그들이 만약 효도를 중시하는 백성이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오래 그곳에서 존속 번영할 것을 말함이라는 것은,
적당한 해석이라 일컫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나의 미국(유학시절) 애머스트에서 배우던 때, 성서학교수 필드(Field)선생은 내게 말해주었다.
‘충효를 중히 여기는 국민이 오래 그 국토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리는, 내가 일본 및 지나(1권 105p주 참조)의 역사를 읽고 비로소 밝히 안 일이다’라고,
실로 충효의 정신은, 동양국민의 특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 나라는, 오래 존속번영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부모 또는 웃어른에 대한 존경심 희박하고, 언제나 반항적 태도로 나가는 국민은, 도저히 오래 그 땅에 안도할 수가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법도이다. 그리고 또 다만 국가에 있어서 그리할 뿐 아니라, 개인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가령 두 청년이 있어서,
그 한사람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두텁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고 매우 자기중심일 것인가?
청년을 멸하려는 무서운 유혹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자 누가 과연 안전할 것인가?
적어도 나 자신의 실험에 비추어 볼 때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몇 번이고 청년을 위험에서 구해 낸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다.
결국 윗사람에 대한 존경 복종 속에 만물조화의 정신이 있다.
그러므로 통치자에 신뢰하여, 국가사회, 또는 집을 생각하는 마음 두터운 자의 가슴속 깊이에, 평안이 깃드는 것이다.
저 구미의 사회에, 근간 빈번하게 스트라이크(Strike-동맹파업) 기타의 커다란 소요를 일으킴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그 원인의 하나는, 그들에게 ‘부모를 공경함’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으로가 아닌가?
그들은 줄곧 제정을 배척하고, 민주주의를 구가한다.
민주주의 혹은 가하리라.
그렇지만 그들의 어른에 대하여, 그 가장에 대하여, 그 노인에 대하여, 그들은 경의를 표할 줄 모른다. 이런 만큼 북미합중국의 국운은, 과연 장구를 할 수 있을는지 어쩔지, 커다란 의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들 일본 국민에게 무거운 책임이 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특별한 국민적 정성으로서, 주어진 충효의 정신을 보존하고, 더욱 이것을 성화하여, 그리하여 세계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어른에게 쓰일 것인가(섬겨야 할까?)’
하나님께 대하는 마음으로써 할 것이라 하지만도, 실제상에 있어서 매우 곤란함을 면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웃어른 그들 자신이 인간으로서 오류 많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부모를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이를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께서, 그 부모에 대하여 취한 길(도리)은,
곧 이를 우리들의 모범으로 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누가복음 2장 4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다.
그는 나이 12세 때 부모를 떠나, 홀로 예루살렘에 머물고, 부모가 그를 찾아 되돌아오는 것을 보자, 그들에게 아뢰어 말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고,
즉 그는 유일한 조건하에, 그 부모에게 쓰인(섬긴)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봉사(섬김) 이것이다.
그는 부모의 자식임과 동시에, 또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에 대한 봉사(섬김; 예배)는, 부모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 한가지 일이 인정될 것인가.
즉 만강의 존경으로써, 모두 부모에게 복종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대답한 후, 부모 따라 돌아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더 귀히 여김을 받으며, 성장했던 것이다.
그이는, 요한복음 2장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가나의 혼연에 있어서와 그의 태도이다. 그때, 그 어머니의 말에 대답하여 말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고,
얼핏 보기에 비례(非禮)의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씀하심과 동시에, 그는 곧 어머니의 요구에 따르는 이적을 행하여, 크게 그 어머니를 기쁘게 했던 것이다.
즉 복종한 것이다.
단 하나님과 우리와의 간계의 승인을 구한 후의 복종이다.
이 관계는 반드시 승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후에는, 만사에 있어서,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 예수께서 얼마나 효심 두터운 사람이었는가는, 그의 십자가상에 있어서의 최후의 태도가 명백히 보여주는 바이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던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 대(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복음19:26-27)’
이것이 전 인류의 구원의 대책임을 지시고 죽으시려는, 예수의 최후의 말씀임을 안다면,
누가 그의 심후한 효심을 찬미치 않을 수 있으랴!
부모로 하여금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직접 관계를 명백히 알게 하도록 하라.
그런 후에, 부모에 대하여 절대로 복종하라. 이는 그리스도교의 효도이다.
십계명 제5조(제5계명)는,
실로 심원한 교훈이다.
그리고 이 교훈의 진의를 천명하고, 그릇됨이 없는 적용을 지시하는 책임은,
생각건대 서양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동양인 위에 있다.
윗사람(상사)에 대한 존경심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동양인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로서, 우리들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봉사의 열매를 울릴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효도문제에 있어서는 서양인이 공헌치 못하는 바를 동양인-즉 일본, 지나, 조선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 위해 공헌할 것이리라.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물론 나는 충효는, 서양인에게는 없다고 하지 않는다.
임금에 대한 많은 성실한 존경과 봉사, 부모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효양, 나는 그 실례를 서양인 중에서 보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실하게 신수 되는 때, 진정한 충효로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충효,
다름 아니다.
윗사람에 대한 성실한 표현이다.
사람을 성실케 하는 복음이 그를 불충 불효되게 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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