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0일 월요일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지 말라


십계명 3

출애굽기 20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지 말라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자를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이름에 관한 계명이다.
이러한 계명이 십계명중의 일조로 데에는, 깊은 이유가 없어서는 된다.

그리고 (의의) 연구할 , 우리들은 일조도, 또한 인류 위해 가장 중요한 교훈임을 아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일컫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를 존중히 여겨, 무의미하게 일컫지 말라는 것이다.

무릇 이름을 자주 말하는 때는,
차츰 귀함을 잃고,
드디어는 이름으로서 표시된 자체가,
귀하지 않게끔 되는 것이다.

실로 Famility begets contempt(친근은 모멸을 낳는다)이다.
사람에 대하여 그러하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

일상의 교제에 있어서 입을 열면, 반드시 성호(성명) 말하는 같은 일은 하나님께 관하여 천박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이것을 해득하지 못하고서, 먼저 이름에 친숙해지면,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게 되리라는 예상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빈번히 성호(거룩하신 이름) 부르게 하는 것은, 종교 교육상의 일대오류라고 하지 않을 없다.

시험 삼아 니찌렝슈(일련종) 있어서의 소위 제목 또는 정토문의 염불 등의 실상을 보면, 충분히 알아차릴 있으리라.
나무 묘법연화경이라 하고, 나무아비타불이라고 한다.
모두 간단한 한마디 가운데, 심원한 신앙 모두를 포함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름을 함부로 일컬어 무의미한 반복을 계속함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거의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 그리스도, 천국, 영생 등의 말을 남용하여, 자주 이를 말할 때는, 처음은 이름이 천한 것으로 되고, 나중에는 이름이 대표하는 자신까지 가치를 잃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다만 점에서 본대도, 이름을 귀히 여기는 것은, 작은 일인 듯하면서도 사실은 매우 큰일이다.
나아가 이름이란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를 아는 ,
계명의 보다 깊은 뜻을 해득할 수가 있다.

이름은 과연 가벼운 문제인가?
일본어에 있어서 가나 운다또는 소리나다, 소리내다, 울리다, 울려 퍼지다등의 말에 쓰이는, 가장 가벼운 음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름) 말하여 경시하는 것은, 이상히 여길 못된다. 그리고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명실상부)하지 않은 경우에는, 이름을 버리고 실을 택해야 것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이름은, 결코 등한히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옛날부터 이름을 경시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을 아담이라 이름하고, 하와(에바) 하와(에바) 이름하셨으며,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개명하신 것에는 깊은 의의가 있었다.

이삭이라 이름을 짓고, 야곱이라, 또는 예수라 이름 지으신데도, 깊은 의의가 있었다.

시몬을 베드로라 부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사울을 바울이라 고친 것도, 필시 깊은 이유가 있었으리라.

이름은 실로, 한마디로,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다.
서양 속담에 말한다. Nomen est omen이라고. 그렇다. 이름은 표시(또는 표호)이다.

예언이다. 그리고 역사이다.
처녀 마리아의 아들을 이름하여 예수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고지(지시) 따른 명령이었다.

예수 여호수아, 여호와 구원하신다 뜻이다.
그리고 이름은 실로 그의 표호요, 예언이었다.

그의 30 년의 지상에 있어서의 생애와, 승천 오늘에 이르기까지, 2 년간의 세계역사는, 분명히 이름이 잘못되지 않은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 가운데 나타난 예언은 성취하여, 역사로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의 이름은, 예수 자신과 동일하다.
이름은 사람됨(인물됨) 밖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름을 귀히 여기는 것은, 사람의 천성이다.
상인은 이름이 보존되기 위해, 재산을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무사는, 이름이 더렵혀지지 않기 위해, 생명도 거는 것이다.

특히 이름은, 이스라엘인의 경우에 있어서 귀한 것이었다.
그들은 짧은 한두 마디로 이름으로써 사람이 어떤 것인지를 표현케 했던 것이다.
이름은 그들 각자의 예언이고, 역사였다.

하나님은 지으신 사람에게까지도, 적당한 이름을 주어, 그리하여 사람을 대표하게 하신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 하시고, 이것을 모세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만민에게 명시해 주신 데는 깊은 의의 있음을 의심할 수가 없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애굽기3:13-15)

나는 스스로 있는 , 나는 있다고 하는 , 이분이 여호와이다.

그리고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한다.

안다.
짧은 한마디(히브리어로는 불과 개의 자음으로써 표기된다) 가운데, 하나님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로써 우리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한마디(일언)로서 대표케 것인가,
여호와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표호(이름)이고, 예언, 역사이시다.
하나님의 성격과 사업의 전부가 가운데 표시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떤 연구가 여호와 이름의 연구보다 중대하랴이다.

도대체 여호와 어떤 (의의)인가!

스스로 있는 어떠한 존재자 인가?
스스로 있는 이것을 영어로 I am that I am이라고 한다.

전에도 있었고, 이제도 있고, 장차 전능자 일역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자요 전능한 - 한글역) (요한계시록1:8-)이다.

존재의 근저로서,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시다. 다른 것은 없대도, 이것만은 있는 것이다.

스스로 계시는 ,
영원한 존재 ,
유일한 존재 ,
the Being 이것이 여호와이시다.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산천, 호해, 천지, 일성, 또는 우리들 인류, 기타 만유는 모두 피조 것이다.
모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 모두 무한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이고, 미래에 소멸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만물은, 모두 소멸되어 버린대도, 우리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만은 영원 존재자이시다.

분만은 스스로 있는 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하여, 적어도 철학 합리적인 귀한 정의라고 하지 않을 없다.

그렇지만, 근래 학자의 연구의 결과, 정의에 아직 다하지 못한 부족한데가 있음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에 있어서의 구약성서학의 태두인

S. R. 드라이버(그는 고등 비평가의 한사람이라고 하지만도, 신중하고 심원한 학자이다)
W. R. 스미드(고등 비평가 좌당으로 불리 우고, 교회에서 축출된 학자로서, 세미틱어의 대권위)
A. B. 데이비드슨(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학자인 동시에 평신도의 마음을 사람) 삼대학자가 뜻밖에도(예기치 못했지만도) 여호와의 의의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일치했던 것이다.

히브리어의 Ehych asher ehyeh, I am that I am(스스로 있는 )로서는 아직 부족하다.

I will be that I will be(스스로 있고자 하여 있을 )이시다.

동사를 미래의 뜻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있는 아니면, 있고자 없지만도, 그저 있는 아니다.

서서히 있고자이다.
있음 essence(존재, 실체)이다. 심수(중심; 중추)이다.
있을 , phenomena(피노미너, 현상이라는 피노미넌 phenomenon 복수형)이다. 발현이다. 화성이다.

그래서 여호와 어원은, 있음보다도, 이름() 뜻이라고 한다.

한없이 자기를 나타내시는 ,
전에 있었고, 지금 있고, 이제 있을 ,
그런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독일에 있어서도, 델리치(1 55p 참조), 에발트(190p 참조) 이대학자가 설을 주장했다.

이렇듯, 학자의 연구 결과, 여호와의 이름은, 보다 심원한 의의를 발휘해 오게끔 것이다.


여호와는 영구히 있을 이시다. 오늘의 여호와는 내일의 여호와는 아니시다.

내일은 오늘보다 크고, 귀하여,
명년은 금년보다도 크고, 귀하며,
이렇게 10, 100, 영원에 걸쳐 한없는 진리와 은총을 인류에게 제시하시는 자이시다.

환언하면,
그는 영구히 약속(언약)하시고, 그리고 이것을 실행하시는 신이시다.

I will be that I will be 있고자하여 있을 ,
이렇게 있고자 하시고, 최후에 이것을 실현하시는 ,
그런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아담에게 보이신 것보다도,
노아에 이르러 다시 깊이 자기를 나타내시고,
아브라함에게 다시 귀하게,
모세에게는 다시 크게,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에게는 다시 밝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한번 완전하게 나타내 보이셨다.

그럼에도 사람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자,
사도들을 통하여 다시 원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남기신 것이다.

실로 있고자 하시고 있을 자이신 하나님이시다.
새로운 진리와 은총을 한없이 나타내시고, 어디에 이른대도 다할 모르는(무궁무진의) 하나님이시다.

은총도 종국에 달하여 끝난(막힌)대서는, 이미 은총은 아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심산을 찾아서 단풍을 바라보는 것같이,
봉우리가 다하면,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새로운 봉우리가 안전에 전개되듯, 절경은, 승경으로 잇달아, 그칠 모르는, () 것이다.

그는 은총으로서 은총에 더하고,
약속으로서 약속에 더하여, 한없이 이를 실행하신다.
그러므로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여, 하나님의 전부를 나타내기에 족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있고자하여 있을 자이시다.
그렇다면 한번 그리스도로서 세상에 임하여, 은총을 인류에게 베푸셨다고 해도, 일은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다시 새로운 은총을 우리 위해 더하시고자 하신다.
우주만물의 부흥,
우리들의 신체의 영화,
사랑하는 자와의 재회,
이는 모두 그의 약속이시다.

그리고 약속을 실행하기 위해, 그리스도 다시 오신대도, 무엇 괴이히 여길 있으랴!
이는 실로 있고자 하여 있을 여호와 하나님께 적합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름 가운데, 하나님의 모두가 포함되는 것이다.

귀할진저! 여호와의 이름.
이름은 함부로 이것을 일컬을 아니다.

여호와의 성호(성명), 복음 그것과 가지로 이를 존중해야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없다 하지 아니 하리라 하신다.

무슨 까닭인가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서,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귀히 여기지 않고, 불성실한 마음을 가지고서 무의미하게 이것을 말하는 자가, 하나님께 처벌되는 사실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처벌되는가?

귀한 이름을 함부로 일컫는 자에게는, 이름 먼저 의의를 잃고, 결국에는 하나님 자신이, 심중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것 목전의 형벌이다. 세상에 두려워해야 형벌치고서, 같은 없다.

성서를 펴서 읽어도, (의의) 해득할 없고, 기도를 해도 다만 형식에 그치고, 모든 귀한 것이 마음에 효과 없는데 이르면, 참담함이란 어떠하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하시는 최대의 형벌은 이것이다.

그리고 현재 그리스도교 국민으로서, 벌을 받고 있는 자는 결코 적지가 않다.
미국에 있어서의 많은 청년, 또는 신사가, 잡담, 또는 유희하는 동안에, 성호(성명) 남용하는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자는, 그들을 위해 통탄치 않을 없다.

그들은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될 가망 없는 신앙상의 타락자이다.
신앙 타락하여 성호를 남용하고 성호를 남용하여, 신앙은 더욱 타락한다.

악마(Satan)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함부로 일컫게 함과 동시에, 이를 함부로 일컫는 자는, 더욱 심하게 악마의 수중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여, 주의하라.
전도자여, 특히 주의하라.
자녀를 교육하는 자여, 제일로 주의하라.
없이(의미 없이) 거룩한 이름을 일컫지 말라.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형식적인 기도회를 열지 말라.
한번 성호(성명) 입에서 발하는 때는, 숙연하여, 경건심 넘치게끔 하라.

아버지여, 원하옵기는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내촌감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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