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요한복음1:17)’
모세의 십계는 말씀 그 자체가 위대하다.
이것을 듣는 자는,
그저 고대 법률로서의 지적 흥미를 환기케 할 뿐 아니라,
그 마음에 여러 가지 감상을 품지 않을 수 없게끔 한다.
혹은 종래에 스스로 의롭다하고,
‘자신은 살인하지 않고,
간음치 않고 도적질하지 않았다고 믿고,
또 안식일 성수 같은 것은 유대사상이라 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지나(-1권 105p)의 교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 자가,
여기서 새로운 훈계에 접한 것을 느끼며,
십계의 이상으로써 하면,
하나님 앞에 중한 죄를 범한 자야말로,
실로 나 자신이라’는 감념을 강하게 하는 자도 있으리라.
혹은 한 걸음 나아가,
이러한 광대하고도 심각한 계명으로 문책된 때,
어찌할 수도 없어
‘이는
너무나 과당
한 요구로서,
약한 인류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불가능한
일을 실행하려는
것 그
자체가 오류이다.
십계는 이상이다.
그리고 인류는
진화의 도중에
있는 자인만큼,
지금 당장
이상에 도달할
것을 기할
바는 아니다.
십계 꼭
이를 지킬
것은 아니라’는 사상을 일으키는 자도 있으리라.
혹은 스스로 이를 지킬 수 없는데서 도리어 이 가르침을 말하는 자에 대해 생각을 돌려
‘그 자신이
이것을 지키지
못하지 않는가?
그 자신이
살인자, 간음 자,
절도 자로서,
그 자신이
최대의 죄인이
아닌가!
교사 자신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우리가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
만약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자가 멸망된다면,
교사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멸망되는
것이다. 그러면 멸망
반드시 슬퍼할
것 못
된다’고 하며,
이 문제의 해결을 도피하는 자도 있으리라.
이처럼,
혹은 그 죄를 자신이 지려하고,
혹은 이것을 이웃에,
또는 인류 전체에 들리려 하지만,
그 어느 것 이라 해도,
십계명은 인심에,
일대 혼란을 분기케 하지 않고서는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실로 십계의 성질상 당연한 일로서,
만약 이 일이 없을 것인가?
우리들은 그 사람 위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십계명은,
먼저 만인에 대한,
대문제의 제기자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킬 수 있음과 없음은 잠시 두고서,
십계명은 실로 완전한 율법이다.
누구나가 그 장엄 위대함을,
탄미치 않을 수 없다.
가령 이것을 가지고서,
너무 엄격하다 하고,
적어도 그 경감을 구하려 해도,
십계는 엄연하게,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십계는 동요치 않는다.
마치 후가꾸가 우뚝 천주에 솟아있듯,
십계도,
또한 사람이 이것을 철회하려해도 불능이다.
혹은 스스로 실행할 수 있거나,
혹은 할 수 없거나,
십계는 인류의 이상이다.
사회 근저이다.
하나님은 일단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또 영원히 동요치 않으신다.
그 누구나가 이것을 승인하고,
그리고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율법은 주어져,
이를 움직일 수 없고,
이상은 제시되어,
이를 뒤엎을 수 없다.
장엄하고도 위대한 십계명은,
우리들 앞에 서서,
그 실행을 재촉한다,
그러면 그 누가,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가?
그 하나를 지키려하면,
다른 것은 곧 무너져 어찌할 수도 없다.
구문의 빗장(a
bolt)을 확보하면,
다른 한 문으로 적을 침입해 와서,
내 중심을 점령하는 것이다.
일찍이 전쟁이(본권 끝 부록의 세계대전 참조)
한창일 때,
독일의 고심을 그려낸 풍자화에 독제 카이제르가 그 손과 말로 수다한 문을 막고서,
그리하여 적을 막지만도,
뒤를 돌아보면,
배후에 의외의 방면이 부서진 곳이 있어서,
도리어 수습할 길 없음의 상태를 시사한 것이 있었다.
십계에 대한,
인심의 무력은 거의 이와 비슷하다.
그 전부를 지키는 일이란 도저히 불가능이다.
고래로,
한사람이라도 이것을 지켰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그러면 각자 서로 상의하여,
이를 미신으로 돌리고,
또는 구사상으로 묻어버릴 것인가.
드디어 홀로 하나님 앞에 선 때,
거룩하고,
확실한 십계는 의연하여,
움직일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옴을 어찌하랴!
사실은 명백하고,
또 그럴 리 없다.
이 기이한 심적 상태에 빠뜨려져,
인류에게 심각한 고통이 있다.
어떻게 하여,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십계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리고 이것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없는가?
혹은 서서히 차츰 이 길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길은,
어디에 열리지 않는가?
이는 인류 있은 이래,
사람의 힘으로써 해결하지 못한 지난 지대의 문제이다.
바울이 로마서 또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려 한 문제는,
즉 이것이다.
그러므로 양 서한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문제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서 해답에 접하는 것은,
결코 이것을 정해하는 방법이 아니다.
학생은 교사에게 주어진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이것을 해결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그 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어떤 암시(hint)를 받은 후 비로소 완전한 해답에 달하는 것이다.
우리들도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지고 있는 괴로운 문제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후에,
비로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배울 수가 있다.
율법이 우리 심중에 제기하는 대 문제를 모르고서,
복음을 해득할 수는 없다.
바울은 인류의 위인 중 하나였다.
그 두뇌의 위대 또 명석함,
그리고 그 신앙의 열렬 또는 심원함이란,
누구도 미칠 수 없는 바였다.
만약 세상에,
완전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즉 바울이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제1위를 하강하는 일없는 인물이었다.
그로 하여금 정치가 되게 하고,
또 철학자 되게 한다면,
그는 반드시 세계 최대의 정치가 또는 철학자로 되었으리라.
이 위대한 바울 선생,
세계 인류의 사표로 숭앙되는 바울 선생이,
한번 자기의 경험을 말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 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로마 7:14
이하-)’.
율법의 거룩함 알고,
그리고 이를 지키려하지만 지킬 수 없고,
내가 원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
내 속에 두 개의 내가 있다.
이상을 알아,
이것을 추구하는 나와,
선을 행치 못하고 악을 행하는 나와,
이자 서로 분리하여,
서로 싸우는 것이다.
바울은 이 고통스러운 문제의 해결에,
전력을 경주하고서,
최후의 외침을 발하여 말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7:24-)’. 고.
혹은 생각한다.
그가 3년을 아라비아(1권 300p
참조)의 광야에서 보낸 것은,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기대함이 아니었던 가고.
그것은 어쨌건,
그가 이 한마디에 이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기쁜 소리를 하기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바울은 확실히 오랜 고투의 역사를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홀로 바울만의 문제는 아니다.
루터,
칼빈(1권,
196p 참조),
녹스,
크롬웰(1권 8,
121p 참조),
기타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리스도인은,
모두 한번은 이 경험을 거친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문제의 해결로 고뇌한 최후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고,
여기서 완전한 구원의 길을 발견하여,
환희와 감사로 차게 된 자가,
즉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은 또 같은 경험을 다른 말로써 진술하여 말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2:19-20)’고.
실로 그러하다.
그리스도교의 초석 또는 그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교는 여기서 출발하여,
이 위에 전설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에 있어서,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연구하려는 동기에 여러 가지가 있다.
혹은 그것이 세계적 종교인 까닭에,
이것을 배우려하고,
혹은 사회를 교정하는 기구로서 이것을 사용하려하고,
어떤 이는 경우상의 고통에서 피하기 위해 이에 의존하려 하고,
또 어떤 이는 인생의 모순을 해석해야 할 종교철학의 일종으로서 이것을 탐구하려 한다.
그중 특히 가장 흔한 것은,
불우한 환경에 있어서,
자기의 안심을 구하려는 것과,
종교의 오락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바울의 신앙의 근저는,
전연 이러한 동기와 그 취의를 달리했다.
그는 경우적이 아니고,
사회적이 아니고 인간적이 아니고서,
개인적 또는 윤리적 또는 영적이었다.
그는 율법과 자기와의 조화에 고심하는 나머지,
그 해석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거룩한 율법이 있는데,
이것을 지켜야만 하였고,
그렇지만 지킬 수 없고,
이는 인류에게 있어서,
영구한 의문이다.
지켜야 할 율법과,
지킬 수 없는 자기와,
이자 어느 것이 과연 참인가?
율법이 만약 참이라면,
자기는 멸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해서 멸망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따를 수 있을까?
참된 그리스도교 연구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입장에서 볼 때,
신약성서는,
극히 해득하기 쉬운 글(책)이다.
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기타 모든 복음서,
또는 서간에 있어서 보인 중대한 진리는,
모두 이것을 해득할 수 가 있다.
그리스도의 처녀 강탄이라든가,
그 육체부활이라든가,
그 승천,
그 재림이라든가.
모두 이런 믿기 어려운 사실을 믿기 쉽게 끔 한 것은,
로마서 7장 7절 이하에 있어서의 마음의 태도일 뿐,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서,
성서적 신앙을 품을 수 없고,
이 문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떠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나로 하여금 과거 30유여년 동안 복음을 말하면서,
싫증나지 않게끔 한 것이다.
가령 오늘날,
복음을 말하지 않으려 결심해도,
내일 일찍 이미 이 문제가 내게 다가와,
다시 복음에 들어가지 아니치 못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먹는 일을 폐하려는 결심과도 같이,
기갈은 나를 몰아,
그 실행을 불가능하게끔 한다.
사람은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한,
복음에서 피할 수 없다.
이 출발점에서 출발한 자만이,
잘 신약성서를 해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에 이르려고 하면서,
그 출발점을 달리하는 자와 함께 구원을 말할 수는 없다.
종교철학이라!
그것은 그저 사람으로 하여금,
자고하게 할뿐인 것으로서 조금도 문제의 해결을 제공치 못한다.
가정문제,
또는 우주문제라!
이에 앞서서 너의 영혼 문제를 어찌할 것인가?
하나님의 율법에 접하여,
이것을 지킬 수 없는 윤리적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죄의 책임은 과연 사회,
또는 선조 또는 부모 또는 친구에 있는 것일까?
아니,
죄인은,
도리어 그대 자신 아닌가?
이 사실을 자각하고,
한번은 바울과 함께 가슴을 치면서
‘오호라 나는
곧고 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탄식을 말한 자가 아니고서는,
함께 그리스도교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율법에 쫓겨,
어디서 그 해결을 얻어야 할 것인지의 깊은 고민을 거친 사람은,
그 경력소양의 여하를 물을 것 없이,
서로 손을 잡고,
충심에서의 기도를 함께 할 수가 있다.
시인 콜리지는 말하기를 ‘인류의 붓(pen)으로 된
최대의 글(책)은 로마서이다’라고.
그렇지만,
한번 자기를 이 입장에 둘 것인가,
이 세계 최대의 서인 로마서는 결코 난해의 서가 아니라,
젊은 나이의 부녀자도 이것을 해득할 수 있고,
학문 없는 노동자도 이것을 맛볼 수가 있다.
로마서를 난해의 서라 하는 이는,
그 제7장의 말을 자기의 소리가 되게끔 하지 않는 자이다.
누구나 조우하지 않으면 안 될 율법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서,
성실하게 이것을 해결하려는 자에게 있어서는,
신약 성서의 전체가 환희이다.
감사이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지금의 그리스도교는 어떠한가?
먼저 제일로 사회적이다.
그리스도교 무엇인가고 물으면,
지금의 그리스도교 신자,
특히 미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는 대답하여 말한다.
‘사회적 봉사 (Social
Service)’라고.
즉 사회 본위의 그리스도교이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라는 소리를 발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이다.
‘아아,
불완전한 사회인지고’라고 외치는 그리스도교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그리스도교 신자,
미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는,
신약성서 그대로의 신앙을 가지기를 꺼리는 것이다.
그렇다,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 그리스도교에,
그리스도의 이적적 출생,
그의 부활,
그의 승천,
그의 재림 등을 믿음의 필요는 없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며,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
그 사랑을 나타내셨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천연의 법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활을 믿지 않고,
재림을 웃어댄다.
그러나 문제는,
천연의 그것은 아니다.
양심의 그것이다.
어떻게 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것인가.
이 심각한 문제를 윤리적으로,
실제적으로,
우주적으로 공구하면,
마침내 신약성서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 같은 결론에 도달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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