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제4조
출애굽기 20장 8-10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7일 중 1일을 안식일로서 특별히 기억하여 이것을 성수 하라는 계명이다.
그리고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 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출애굽기 31:41)’는 것이다.
실로 엄숙한 법칙이다.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광야에 있을 때, 어느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주었기 때문에, 드디어 진 밖으로 끌려 나가 돌로 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성서 중에 명기되어 있는 사실이다.
(민수기 15:32이하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어찌하여 안식일 성수는, 그렇듯 중요한 문제인가?
이것을 십계명 중의 하나로 싣고,
이것을 범하는 것을 가지고서,
투도(偸盜), 간음, 살인과 한가지의 죄로 여기고,
그 사람을 사죄에 붙여야 한다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만약 그런 법률로서, 오늘 우리나라에 임한다면, 삼 백 만의 도쿄(동경) 시민이라지만, 그 다수는 사죄를 면하지 못하리라.
아니, 다만 우리나라에 한하지 않는다. 구리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도 근래 안식일 성수는 문명의 진보를 저해한다하고, 이것을 유대인의 율법이라 칭하여, 배척하는 자 많아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근저인 모세의 십계는, 엄연히 그 제4조(4계명)에 있어서, 안식일 성수를 싣고, 그리고 이것을 영원불변의 법칙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십계명의 연구 중 가장 곤란한 것은, 이 문제이리라.
안식일은 과연 이것을 성수 하여야만 할 것인가?
근대인이 주창하는 바가 옳은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모세가 가르치는 바가 참된 것일까?
이것을 안식일 문제라고 한다.
즉 제7일(토요일)에 모든 업무를 폐하고,
가족복비(남녀종)를 비롯하여, 가축에 이르기까지 이에 휴양을 주고,
그리고 회당에 가서, 율법을 배우며, 그리하여 이날을 성별 하는 것이다.
이는 현금도 독신의 유대인이 실행하는 바 일이다(그리스도인 사이에 있어서, 토요일 안식일이 어떻게 해서 일요일로 변경되었는지는 그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안식일 문제는, 다만 날로써 끝나지 않는다.
제7월(우리들의 10월 중순에 11월 중순까지)에 안식월이 있고,
제7년에 안식년이 있고,
7년 7차 후 50년에 희년(기쁨의 해)이라 칭하는 대안식년이 있다.
그 제7년은, 땅의 휴식년으로서, 즉 땅을 삽질(가래질)을 한 후에, 파종치 않고서 두는 것이다.
또 그 제50년에는, 다만 토지를 휴식케 할 뿐 아니라, 그때까지 계속되던 모든 대차관계를 소멸케 하는 것이다.
즉 차금의 증서는, 이것을 무효로 하고,
몸을 판자는, 그 자유를 회복하고,
토지를 저당에 붙였던 이는, 모두다 그 반환을 받는 것이다.
모세율에 의하면, 모든 유대인은 토지의 소유자였다.
누구든지 자기 가족에게 식량을 공급하기에 족할 만큼의 토지를 가지지 못한 자는 없었다. 무릇 토지도 공기 또는 일광과 한가지로, 인류 생존상 없어서는 안 될 필요물인 까닭에, 만인에 대하여, 그 향유를 보증한 것이다.
물론 사정 따라서는 토지를 저당에 붙이는 것을 허락한다 해도, 이것 때문에, 드디어 그 소유권을 상실하고 행복의 기본을 박탈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49년을 지내면, 반드시 그 소유자의 수중에 이를 반환케 한 것이다.
이는 실로, 모세율의 탁발한 사회정책이었다.
바야흐로 토지소유자는 극히 소수이고, 더구나 사회개조의 소리가 그저 시끄럽게 훤회 하는 때에 있어서, 만약 이 모세율 같은 법률이 실행된다면 어떨까?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그 지방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안식일 문제는, 단순히 제7일에 업무를 쉬는 것만의 문제는 아니다.
제7년의 경지휴식인 농업경제상의 대 문제가 있다.
또 제50년의 토지소유권 회복인 사회 정책상의 대 문제가 있다.
이것을 모르고서 안식일 문제의 중요(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도 없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고 한다.
‘기억하여’는, ‘다시 생각하여’이다.
즉 안다. 이스라엘은 이때 비로소 안식일에 대하여 배운 것이 아니다.
시내 산상 십계명을 받기 이전 이미 알았었음을,
Sabbath의 원어 사바트는 ‘그친다’, ‘누른다(억제한다)’, 또는 ‘쉰다’등의 뜻이다.
그리고 이 말은 결코 유대 특유의 말은 아니다.
유대보다도 훨씬 오랜 문명을 가진 바벨론에도 이미 ‘사바-츠’라는 제도가 있었다.
적어도 7일로서 하나의 기원으로 하는 사상은, 인류 전체의 통유(공통)의 것임을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있어서도, 고래로, 병 요양 기타에 일주로서 일기로 하는 풍조가 있고,
또 여아의 7세, 남자의 21세에 달함을 축하하는 습관 있었으며,
특히 현저한 것은, 7일 중 1일 휴식의 구 관습이 곳곳에 있어서 행해지는 일이다.
이바라기껭(즉 일본의 수도인 동경의 일부 6계의 1지방) 가바상 산록지방에 있어서 옛부터 7일 중 1일 밭에 나가 노작하지 말 것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모내기 때 등, 부득 할 경우에는, 특히 시간을 제한해, 이것을 허락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만약 이 습관에 위배하는 자 있을 때는, 촌민 모두가 제재를 가했다는 것은, 왕년(past years)내가 그 지방에 가서 친히 청취한 일이다.
또 메이지 초년, 한때 매달 16의 날로서 휴일로 정한 일이 있었지만도, 그것이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않는대서,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일요일 휴식으로 복구한 것 등의 실례로써 본대도,
안식일 또는 이에 유사한 제도는, 인류의 사회 조직상, 또는 신체의 생리적 조직상 절도 발달해 온 천연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 것임을 안다.
안식일은 실로 인류 통유의 원시적 제도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 말을 ‘기억하여’이를 거룩히 지켜야 할 것이라고 명해진 때에는, 결코 그들의 구에 새로운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부터의 안식일은 이를 다시 생각하여, 특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로서 이를 거룩히 지켜야 할 것이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안식일은 안식의 날이다. 그렇지만, 쉬는 것은 일하기 위해서이다. 쉬라, 단 쉬기 위해 일하라.
만약 일하지 않고서 다만 매일 휴식하는 것은, 고통의 극이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은거하는 일의 상태가, 그것을 증명한다.
일하지 않는 자는, 안식이 무엇인지를 해득하지 못한다.
참으로 쉬고자 하는 자는 크게 일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하루를 거룩하게 쉬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작은 휴식 위해, 휴식은 노작 위해서이다.
호상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다. 하루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가 비로소 새로운 힘에 차서, 다음 엿새의 노작에 옮길 수가 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달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우리나라에 있어서 정숙한 안식일을 맛보는 일은 매우 곤란하지만도,
외국에 있어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의 하나는,
청교도(puritan 1권 251p 참조) 주의의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는 안식일이다.
신영주(New England-미합중국 동북의 6주)의 산중 등에서는, 아마 지금도 이것을 목격할 수 있으리라.
월요일 아침부터 토요일 밤에 이르기까지는, 격렬한 노동을 계속하지만도,
일단 토요일 오후 12시의 종소리를 들을 것인가, 곧 모든 노동은 중지된다.
그리하여 일요일 아침에 이르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광경(the whole view)은,
전날과 일변하는 것이다.
그 아침, 기상도 보통 날 보다 늦고, 식후 얼마 지나서 회당의 종이, 찬송가 소리에 맞추어 울려 퍼지자, 저집 이집 문에서, 성서를 손에든 남녀노유, 서로 함께 나서서, 회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찬미 있고,
음악 있고,
설교 있다.
끝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정오를 반시 지난 때이다.
이날, 신문 또는 우편이 배달되는 일없고,
기차도, 그 도수를 줄이고 상점은 폐쇄되어,
커튼은 드리워지고, 평일 노상을 뒤덮던 군중의 검은 괴단도,
전부 철거되어 거리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를 꿰뚫어 볼 수가 있다.
실로 숙연하여, 별세계에 있는 생각이 든다.
저녁에는 다시 회당에 모여, 마음 조용히 찬미 기도를 드리고, 돌아와 감사하는 중에 잠 속에 드는 것이다.
이런 일이 왕년 내가 재미 중에 실제로 경험한 안식일 성수의 도시의 광경이었다.
특히 아름다운 것은, 날마다 사역 당하던 우마가,
이날은 들에 방치되어 자유롭게 이리 저리로 달리는 일이다.
이러한 상태가, 사람의 심신에 미치는 감화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이것을 실험하지 않고서 잘 해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세상에 쾌미한 곳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안식일이 성수 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유명한 영국의 재상 디즈레일리경은 말했다.
‘하나님의 은사 중 가장 큰 것은 안식일이다’라고.
이런 안식일의 성수를 사회적으로 실행한자 누구나가 공명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다만 이점에서 본대도, 안식에 관한 일조를 십계명 중에 넣은 이유를 해득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더 나아가, 안식일 문제 중, 토지의 휴경 및 대차관계의 일소 등을 포함함을 안다면, 그 국가사회에 있어서,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국가적 문제 중 최대의 것의 하나는, 토지생산력의 유지이다.
모든 토지는, 이것을 사용할 수 있는 정도 이상에 미치는 때는, 아주 쓸모가 없게끔 되어버린다.
그 좋은 사례는 미국 볼티모어(Boltimore), 워싱턴(Washington) 사이의 철도 연선의 들(평야)에 있어서, 이것을 볼 수가 있다. 세계에 드문 옥요의 땅이, 여러 해의 담배(연초)경작에 의해, 혹사당한 결과, 전연 그 생산력을 소모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역시 크게 그 경향을 본다,
근년 농가의 금비 사용이 격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미가(米價)가 폭등 정지할 줄 모름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모두 토지 학대의 결과, 그 생산력을 소실한 까닭이 아닌가?
토지에 휴양을 주지 않는 형벌에 무서운 것이 있다.
만약 이대로 하면서 돌아보지 않는다면 필경 아무리 자본 노력을 투입한대도, 땅은 아무 것도 생산치 못하게 되리라.
그리고 토지의 생산 절멸함과 함께, 사회는 그 생활의 근저를 파괴당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삼천 삼, 사 백년 전 모세를 통하여, 인류에게 명하셨다. 즉,
‘너는 육년 동안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제 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애굽기23:10-11)’고,
은혜는 토지에 미치고, 칠 년에 일 년의 안식을 주어, 그리하여 그 생산력을 영구히 보존케 한다. 이에 이르러 안식일 문제의 중요(성)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지키지 않고서, 토지의 사멸을 촉구하는 죄는, 음료수에 독을 던짐의 죄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그 죄에 비김(적용)에 사형으로써 한 대도, 어찌 가혹하다고 할 것이랴!
뿐만 아니라, 제 오십 년에는 소실될 토지 소유권의 완전한 회복의 보증이 있어, 그리하여 안식일 제도 중에, 이 세상에 관한 모든 문제가 포함되는 것이다.
신체의 휴양이 있고,
하나님 기념이 있고,
우마의 해방이 있고,
토지의 휴식이 있고,
부채의 면제가 있고,
자유의 회복이 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조화(창조)를 경외함의 제도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안식일은, 우주의 축일이다’라고,
최후로 일언할 것은, 안식일 성수가, 노동의 공정, 또는 신체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다.
다수의 학생, 또는 상인들은 안식일 성수의 좋음을 인정하지 만도 이로 말미암아 경쟁터에 있어서의 패자되지나 않을까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 반대를 증명한다.
나의 청년시대. 삿뽀르 농학교(지금의 북해도대학)에 이르러, 그리스도인으로 된 때의 서약 중 주요한 한 개 조항은, 안식일의 성수였다.
그리고 재교 중 크리스천인 동지 육, 칠은 비록 시험 중 일지라도, 굳게 이것을 계속 지켰다. 그런데 졸업 날에 이르러 명백해진 주의할 바 한 현상은 학급 중의 상석은 모두가 다 안식일 성수자가 차지하는 바로 된 일이다.
안식일 성수는 결코 경쟁상의 열패를 가져오게 하는 일 아니다.
아니, 도리어 그 노동능률 증진의 원인이다.
건강유지의 비결이다.
활력보존의 요건이다.
근간에 있어서 저 신경 쇠약 중에 시달리는 자 많은 일등, 그 원인의 하나는, 안식일 성수를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랴!
스위스의 사상가 힐티(Hilty, Carl)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나도 역시 동의한다.
십계명의 하나로 된 안식일 성수는, 실로 노동문제, 사회개조문제, 기타 각 방면에 있어서의 대소 수다한 난문제의 해결자이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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