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6일 목요일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모세의 십계와 주해

출애굽기 20 3-7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1. 너는 외에는( 앞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진리는 본래 이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하나님에, 하나 이상 있을 없다. 저것, 이것 모두 옳다 하고, 그도 옳다 하는 같은 일은, 진리에 대하여 매우 불충실한 것이다. 나라에 임금 있을 없듯, 우주에 있을 없다. 우주는 ◈코스모스◈이며, 법칙은 모두 유일한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 없다. 다신교는 원리에 있어서 이미 모순적이다.
앞에서(면전에서), 혹은 하나님 외에는-하나님께 대하여, 혹은 하나님과 비교하여, 혹은 하나님과 같이의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때에는, 하나님 이외의 신을 인정해서도 된다는 뜻이다.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4-6)

사람은 만물의 장이며, 그는 하나님 이하의 것에 대하여, 종교적 숭배를 것이 아니다.

바벨론(1 127, 194p 참조) 사람은 (하늘에 있는 ) 섬기고,
애굽(5p 참조) 사람은, 소와 고양이(땅에 있는 ) 섬기며,
팔레스틴 인은, 물고기( 아래 속에 있는 ) 섬겼다.

그들은 형상을 만들고, 금성에 아스타로스라는 이름을 바치는가 하면, 소를 프타신으로서 섬기기도 하고, 고기를 다곤상에 새겼다.

그렇지만 독일무이한 참된 하나님을 섬겨야 유대인은 굳게(엄히) 이런 종류의 숭배가 금지된 것이다.

질투하는 하나님- 질투는, 불실부정을 분화내는 정이다.

보통의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그녀의 전심의 사랑을 요구하며, 아내 이도 또한 그에게도 동일한 요구를 하여 가하다. 만약 동양적 윤리에 따라, 남편 자는 그의 사랑을 수부(다처)에게 나눈대도, 아내 자는 잠잠히 참아야 한다지만, 그녀의 사랑은, 불륜의 행위에 계속 얽매여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정절의 여자일지라도, 그녀는 스스로 그녀의 천연성을 진멸 없기 때문이다.

질투에 선악의 종류가 있음은, 분노에 같은 종이 있음과 같다.
정당한 분노(의분이라 한다) 있음 같이, 정당한 질투도 있다. 아버지가 자식의 불효를 분내는 것은, 당연한 질투이다. 남편이 아내의 부정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정당한 질투라고 하지 않을 없다.

만약 이것을 하지 않고서, 아비가 자식에게서 그의 최대의 사랑을 요구치 않고, 남편이 아내의 은밀 내통(간통) 허락하는 등이 있을 것인가? 이는 아비 , 남편 자의 사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들은 그러한 아버지, 그러한 남편을 가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분노 그것에 없다. 그렇지만 분노의 결과로서, 복수심을 빚어내고, 타인을 해치려 도모하기에 이르러, 분노의 죄는 생기는 것이다. 질투의 죄도, 역시 그러하다. 세상의 소위 질투라는 것은 언제나 죄적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랑에 상당하는 반애의 요구를 나타냄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최대의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지으신 인류에게서, 전심전력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는 정당한 요구로서, 우리들 하나님이 어떤 이신지를 아는 자는,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대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으로서 인정할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가진 하나라도, 하나님의 아닌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우리 전신의 복종과 전심의 사랑을 요구한다.
세상에 이처럼 정당한 요구 무엇이 있으랴! 질투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의 별칭으로서, 우리들은 우리에게서 그러한 사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서, 위대한 위자를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의 벌은, 자손 3-4대에 미치고,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위에는, 은혜 천대에 이를 것이라고 있다.

벌의 엄함은, 은혜의 흥대함에 미치지 못한다. 3-4대의 벌과 천대의 은혜, 하나님은 벌하는 것보다 은혜 베푸시기를 좋아하신다.

하나님의 은혜와 벌은, 이를 우리 인류로서 보면, 자연의 결과라 있다. 자연 법칙이란 것은, 하나님의 성의로서, 하나님의 성의란 것은, 자연 법칙과 다른 것일 없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연법칙을 거슬리고서, 적당한 형벌을 면할 없음은 물론이다.

임금이 노하지 않는대도, 불충의 신하는 형벌 것이다. 아버지가 용서한대도, 불효자식은, 처벌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하심을 거슬리고서, 책벌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 일없다. 이는 하나님의 심한 질투(나쁜 의미에 있어서) 때문에서가 아니라, 은혜 깊으신 천칙이 그렇게 하는 일이다.

우리들이 이것을 역사에 비추어(구하여) , 일신교를 믿고서, 은혜를 자손 백천대후까지 받지 못한 국민 있음을 알지 못한다.

내가 여기서 설명하는 모세의 십계를 받은 유대인은, 4 유여년 후의 오늘도, 국민적 생명을 잃지 않고 있다.

바벨론 (1 127, 194p 참조) 멸망되고,
애굽(5p 참조) 멸망(있으나 없는 것처럼) 되고,
로마(Rome) 무너졌으나,

유대 홀로 조상의 희망과 활동력을 잃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세계에 흩어져 있는(산포해 있는) 불과 400만도 못되는 백성으로서,

멘델스존(음악가), 스피노자(철학자-1 24p 참조), 디스레일러(정치가), 네안더(신학자)등의 제웅을 내고,

로드차일드 일가(Rothschild) 있어서, 세계의 재권을 장악하고 있는가 하면, 가까이는 히르쉬 부처(Hirsch) 있어, 거대한 부를 던져 동포의 곤고를 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팔레스틴(1 292, 299p 참조) 고국 (고지) 사서, 조상의 왕국을 그곳에 부흥하려는 희망을 갖게 했다.

세상에 유대인의 희망처럼 강고 것은 없다. 일신교의 은혜는, 가장 현저하게 유대 역사에 있어서 수가 있다.

페르샤(파사인-1 193p 참조) 또한 조로아스터의 엄숙한 일신교에서 생겨나, 그들은 한때 아시아의 전부를 석권(공약)하고, 상고에서 이때껏 보지 못하던 인정을 아시아의 백성에게 폈다. 이는 역시 그들이 비교적으로 순결한 일신교를 믿은 데서이다.

아라비아인의 발흥(급흥기), 역시 예언자 모하메드가 제창한 일신교에 의해서이다. 그것이 때는, 구주 문명의 중심을 침범하고, 중고의 바그다드, 알함브라(Alhambra) 문화(문명의 호화) 꽃을 피운 것은, 실로 코란경이 전하는, 강건한 일신교적 사상에 의하지 않고서는 일이다.
이에 반하여, 국가의 쇠망은, 언제나 다신교의 선포에 따라 동반해 왔다.
애굽의 쇠운은, 일신교의 쇠퇴로서 시작되었다.
일신교적 사상이 건전했었던 동안은, 그리스, 로마는, 모두 조령(조락; 쇠퇴) 징조를 보이지 않았다.

국민의 발흥기는, 거의 일신 숭배 시대에 있었다. 우상 숭배가 국민적 생명에 미치는 감화력은, 이것을 오늘의 인도에 있어서, 스페인, 포르투갈에 있어서, (태국의 이름), 안남(현재 베트남의 일부) 근린 여러 나라에 있어서 있다.

독일무이의 , 육안으로서 보이지 않는 정신의 , 이는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국민의 생명이다.

하나님은 이름을 남용하는 자를, 벌하는데 있어서 투옥, 벌금형으로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함의 형벌은, 마침내 그를 인식할 없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사람된 자에게 있어서는, 최대 엄벌의 벌인 것으로서, 우리들은 인생에 달리 이같은 고벌(苦罰)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함은,
 진리를 진리로,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서 알지 못하는 일인 것으로서,
 필경에는 추를 미로 평하고,
 압제를 자유로 생각하는 ,
 사상 모두 전도하여 영원을 미무중(미운 오리무중) 보내지 않을 없음에 이른다.

아무리 진리에 조우(遭遇)한대도, 미와 선을 식별하지 못하고, 언제나 정략을 상의(相議)하며, 명리(名利) 말하고, 종교, 이는 정계(政界) 위해서라고 하며, 신불(神佛), 이는 명리(名利) 도구라 하고, 사람에게 성실이라는게 있음의 실재(實在) 믿지 않으며, 세상에 확신이라는 것이 있음을 모르고, 인생을 기계(奇計) 사술(詐術) 써야 하는 것으로 믿는 허다한 정치가, 교육가, 종교가는, 계명의 파계자의 좋은 표본이다.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일컫는 것을 경계한 것이고, 사용을 전적으로 금지한 아니다. 마음으로 존숭하며, 이를 쓰는 , 무슨 죄가 있으랴!

후세의 유대인이, 벌을 두려워하여,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쓰지 않기에 이른 것은, 계명의 진의를 그르친 것이라고 해야 것이다.

시인 리히터가, 창조에 해학(유머) 같은 많음을 평하여,
하나님은 해학의 재료에 ()하시다 것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 경건심 깊었던 그를 아는 자는, 설독(褻瀆)죄로서 그를 책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자부) 사랑을 입어, 아버지와 사사로운 일을 이야기 함과도 비슷한 것으로서, 아버지 이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없이, 자식된 자의 순종을 더럽히는 없음과도 같다.

시인 괴테가 하나님을 부르는데 아버지여라는 이름으로써 하는 그리스도 신도를 책한 같은 것은, 그가 대능(大能)대자(大慈) 하나님의 특성을 확실히 알지 못한데서 말이다.

(),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함에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치 않음에 있다.

신앙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거룩한 이름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종교가,
신도의 마음을 잡으려 공인교의 필요를 선언하는 정치가,
경신애국을 양언하여, 시류의 속해(俗海) 편승하려는 문학자,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적당한 벌로, 미래영겁(영원세월) 진리의 맛을 없는 자이다.

(내촌감삼의 1899 9 동경독립잡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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