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3일 목요일

살인하지 말지니라


십계명 6

출애굽기 20 13 : 살인하지 말지니라

십계명 1 내지 5조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이고, 6 이하는 이웃에 대한 의무이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는, 마음으로써 시작되어, 말로 나아가다가, 행위로써 끝났다.

이웃에 대한 의무는, 행위로써 시작하여, 말에 미치고, 마음으로 끝난다.

모두 간단하고, 명확하다. 우리들의 이웃에 대한 책임, 이에 대하여 취하여야 태도가, 여러 가지 방면에서 명시되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한다. 이웃의 생명을 중히 여기라는 계명이다.

간음하지 말라 한다. 이웃의 가정을 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도적질하지 말라. 이웃의 소유를 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이름을 중히 역리라는 것이다.

생명과 가정과 소유물과 이름과, 이런 것을 중히 여김으로써, 사람의 가장 귀한 것이, 모두 보호되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이것을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웃의 생명을 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은 물론 중히 여길 중의 첫째이다. 세상에 무엇이 생명보다도, 귀히 여길 것이 있는가?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태복음16:26- 참조)이다.

생명은 실로 사람 그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십계명 1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의무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는 같이, 생명에 관한 계명인 6 가운데, 이웃에 대한 모든 의무가 포함되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일본역 중에는 살인하지 말라 되어 있으나, 우리 한글역에는 그저 살인하지 말라 되어 있다).

생명을 중히 여기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어떠한 생명도 빼앗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 시비는 잠시 두고, 모세는 그런 가르침을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는 또는 새를 희생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렸다. 가축은 시대의 초대의 재산이었음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들이 육식을 금령 받고 있지 않았음을 안다.

톨스토이가 제창한 같이, 전쟁, 사형, 기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사람을 죽여서는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치 않는 자는, 드디어 지상에서 절멸된대도, 이것을 변호할 없다는 것은, 구약성서가 밝히 가르치는 바이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고 대서,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어떠한 경우라도의 뜻은 아니다.

이것을 영어로 말한다면,
Thou shalt not kill 아니고,
Thou shalt not commit murder이다.

너는 살인죄를 범하지 말라 이다. 원한 때문에, 또는 사욕 때문에, 또는 부주의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이다.

그렇지만 계명에 의해 나온 것은, 생명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에 있다. 인명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모르고서, 계명의 (의의) 해득할 수는 없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의 생명이 매우 경시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 한사람의 생명이 전우주보다도, 중한 가치로써, 우리들 마음에 호소해 오는 일이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경우 같은 것이, 일례이다.
가령 타인으로서 이를 , 아무 가치 없는 자식일지라도, 부모에게 있어서는, 사람의 그를 잃는 것은, 세계를 잃는 것보다 더한 손실이다.

그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희생으로 제공한대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아니, 이것 위해서는, 자기 자신마저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귀중한 것은, 실로 부모 심정(어버이 마음) 있어서, 사람의 생명이 귀하지 않을 없다. 그도 귀하고, 이것도 귀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주를 버리고서라도, 잃은 사람의 생명을 얻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에 있어서살인하지 말라 계명이 중요한 것임을 해득할 수가 있다.

계명의 상세한 적용은, 출애굽기 21 12 이하에 게재되어 있다. 규정은, 오늘날에서 이를 , 조잡한 법률이라는 느낌을 면할 없는 같다. 할찌나, 그런데도 중에 가장 주의할 , 삼의 사실이 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출애굽기21:22-23)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소를 반드시 돌로 죽일 것이다-일역)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 간에 받아 죽이면 소는 돌로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출애굽기21:28-29)

임부를 쳐서 낙태케 하고, 그리고 아이가 죽은 때는, 생명으로서 생명을 갚을 지니라는 것이다. 아직 태내의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백세의 수명을 가진 생명과 동일한 가치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다.

위험성을 기르는(사육) 소에 대해, 충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감시 보호 방법을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때는, 기르던 주인은 사형 당할 것이라고 한다. 생명에 관한 부주의의 죄를 벌함에 있어서, 엄형으로써 것이다.

태아의 실패와 과실에 의한 살인, 모두 가장 무거운 죄로서 다스려지는 것이다.
이로써 모세율이 생명을 중히 여기고 있음이 얼마나 큰지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지금부터 삼천 오백 전에 속한 것임을 생각하면, 누구도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치 말라)

우리들은 말을 들을 , 전혀 자기에게 관계없는 계명을 듣는 기분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겜뻬이 시대(145p 참조) 호우죠우 시대(1 118p 참조) 등과 같이, 살인이 빈번했던 시세에 있어서는 몰라도, 오늘날 문명세대(문명세대: 세상) 가장 적용할 적은 법률은 일조이다.

우리들은 가끔 각종의 죄를 범해도, 살인죄에 관해서 만은 스스로 안심해도 가하다는 것은, 현대 다수인의 사상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과연 그러한가?
만약 법률가 모세가, 생명을 중히 여겨 마지않는 정신을 가지고서, 20세기의 오늘날에 출현했다고 하면, 그의 예리한 안광은 과연 어디까지에 이르고(미치고)있었을까?

십계명 6조는 오늘날 실로 모세 시대에 있어서와 같이, 아니, 어떤 의미에 있어서 보다 , 적용을 아니냐!

전쟁 문제를 따로 본대도, 현금 세상에 있어서 살인의 계명은, 과연 불필요한 것일까?

근래 미국에서의 소식에 의하면, 나라에 있어서 살인죄의 성행함이란, 아직 일찍이 오늘날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한다.

뇌옥(감옥) 모두 만원이고, 죄수 다수의 살인범 자를 본다는 것이다.
뉴욕(New York)한주에 있어서 행해지는 살인죄는, 영국에 있어서의 그것보다도 다수이다.

그것도 더구나 방법의 잔혹 무자비함이란, 차마 들을 없는 것이다.
살인 결코 문명사회에 드문 죄는 아니다.

살인하지 말라 계명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역시 필요하다.

그런 유의 살벌한 살인죄를 별도로 대도,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살인죄는, 현재 성행되고 있는 것이다.

모세율은, 낙태의 죄를 경계하여, 태아를 죽게 하는 것은, 사람을 잡아, 검으로써 가슴을 찌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죄악으로 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어디에, 죄가 행해지지 않는 곳이 있는가?
많은 산과의 또는 산파가 손가락으로서 천사와도 같은 아이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미국 밀워키-(Milwaukee 미시건주의 서안에 있는 위스컨신주의 상업도시) 시에 있어서, 어느 의사가 다년 개업 치과의로 옮긴이가 있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한 바에 의하면, 원인은 유력자에게서, 낙태를 강요당하는 일이 많아, 견딜 없음에 있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살인죄는,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역시 빈번히 실행되고 있는 일이다. 사람의 주의를 끌지 않는 곳에 있어서, 날마다 몇백의 생명이 죽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뢰와 나팔소리 사이에서 내려주신 살인하지 말라 계율은, 삼천 오백 오늘날에 있어서, 역시 깊은 의의를 잃고 있지 않는 것이다.

현시 세계의 시청을 모으고 있는 것은, 노동문제이다.
오인은, 물론 문제에 관한 미숙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가지 명료한 것이 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본가, 또는 공업주로서 없는 남녀공의 생명을 빼앗은 얼마든가!
구미에 있어서는, 일찍이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고, 공장법을 시행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이것을 실제에 있어서 보면, 무서운 폐해가 그칠 모르는 것을 있다.

가령 방적공장 또는 도검 제조공장 , 또는 숫돌의 분말이 사방에 비산(scattering)하여, 맹렬한 기세로 직공의 폐장 속에 침입하고, 수년 거의 이를 넘어뜨리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얼마나 많은 청년남녀의 생명이 기업가를 위해 희생되고 있는지를 모른다.

혹은 왕년(past years)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광독사건(1 405p 참조)같은 역시 일례이다.

와다라세가와(1 217 224p 참조) 연안의 일대는, 광독이 침해하게 되어, 해가 음식물에 미치게 되고, 때문에 백성을 여위게 하고, 갓난아이는, 모유를 없어, 사망률 격증했던 것이다.

사람의 자본가가, 자가의 주머니를 불리고자, 수만의 백성을 죽이고 있다. 다수의 공장주가 귀한 생명을 희생으로 하여, 공업의 번영을 꾀하고 있다.

아니, 명백한 살인죄가 아닌가?
누가 알랴! 최후 심판의 , 앞에 끌려 나가, 무거운 죄를 문책 당할 , 오늘의 훌륭한 신사가 아니기를...

기타, 근래 문명제국에 있어서, 도처에서 성행되는 음식물의 혼합 같은 것도 죄악이다.
값싸고 유해한 재료를 혼합하여 사람을 속이고, 그리하여 생명을 해친다. 이것 역시 십계명 6조의 위반임을 면할 없다.
왕년(past years), 미국이 아직 전쟁(말권 끝의 부록 세계대전 참조) 참가하기에 이르기 무렵, 각종의 공업회사는 다투어 전시품의 제조에 종사했다. 이는 최대의 영리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많은 주주는 짧은 기간(단일월)사이에 막대한 부를 쌓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생산품에 의해, 허다한 없는 독ㆍ오의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다. 누가 주주의 자녀의 손을 꾸민(장식한) 가락지(지환) 무고한 값일지를 알랴!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거기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다행한 것은, 당시 단호히 전시품의 제조를 거부하고, 때문에 사업의 폐멸을 마다하지 않은 두셋의 제조 공장주이다. 그들은 심판 날에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에 참여하게 되리라.
기타, 우리나라에 있어서, 가장 많은 것으로 일컬어지는 결핵병 환자 자신 주위의 사람들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무서운 비극은 조성되고 있다.

부엌을 맡은 부인의 태만에 의해, 사랑하는 자의 생명은 손상되고 있다.

살인은 결코 우리에게 관계없는 계명은 아니다. 가령 직접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해도, 간접으로 죄에 참여하는 경우는, 아주 많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이것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나아가서, 예수의 가르치심에 이르면, 누가 이것을 면할 있으랴!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5:21-22)

요한도 또한 말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한 1 3:15-참조)라고.

이것을 반면에서 말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한일서 3:14 참조)라고.

우리들은 과연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가?
이를 미련한 놈이라 하고, 바보(천치)라고 하지 않는가?
어떤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는 어떤 사람의 존재 그것을 저주하는 일은 없는가?

이는 모두 생명을 중히 여기지 않음의 죄이다. 살인죄이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한 의지가 살인죄의 근원이었다.

말하지 말라. 나는 살인죄만은, 이것을 범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심판 날에 있어서 우리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죄로 우리를 물으시리라. 형제를 미워하는 , 우리들은 가공할 죄를 범한 것이다.

그렇지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사함 받고, 이에서 면할 있는 길을 여시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것이다.
그곳에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

십계명의 율법으로 문책되어, 우리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오지 않을 없다.

복음은 실로 율법의 완성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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