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7일 금요일

모세의 십계명


모세의 십계명

(1) 십계총론

성서는, 창세기로써 시작하여, 묵시론으로써 끝난다.

그리고 창세기가 전하는 바는, 천지 만물의 창조이다.
묵시록이 전하는 바는, 천지 만물의 완성이다.
이것을 모두 1 가운데 수록하고 있다.

세계 어디에 이런 () 있는가?
그렇지만 성서 하나의 중요한 영역, 또는 구획이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을, 완성에 달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렇다. 그리스도교는 수단이다. 우주의 완성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성서가 모두 그리스도교는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의 일부분이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서 우주를 완성치 않으신다.

그리스도교는 말할 것도 없이, 성서의 중심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의 근저는 무엇인가?

복음의 본원은, 어디에 있는가?
대답한다면, 모세의 십계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세의 십계로써,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 배우고자 하여, 그리스도교만을 수탐(搜探) 수는 없다.

장미꽃의 우수한 향기만을 맡는 것으로써, 미를 상찬하기에는 족하지 못하다. 거슬러가서, 줄기와 뿌리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를 맛보고자 하면, 모름지기 근저인 모세의 십계명을 배워야 것이다.
지금 시험삼아,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고 물으면, 대다수의 사람은 대답하여 사랑의 가르치심이다라고 하리라.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실지로, 사랑의 가르치심이다.

그렇지만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그저 용서하는 정의 사랑(情愛)인가?
아니,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 사랑은 아니다. () 사랑이다.

이것을 밝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를 필요가 잇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복음은 본시 준엄한 율법에서 시작된 것이다.

너는 ~말라, 너는 ~말지니라 율법을, 근원으로 하여 ()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십계의 연구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의 연구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서, 그리스도교를 해득할 수는 없다.

십계명의 정신을 배우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수는 없다.

오늘날 그릇된 복음이 선전되는 때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성질을 분명히 하고, 그리하여 신앙의 기초를 고쳐 세우는 것은,
시급한 급무가 아닐 없다.
이를 일컬어 모세의 십계()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물론 모세의 십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십계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 전하신 것이다. 출애굽기 도는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모세가 시내산 상에서, 하나님과 상접(相接)하여, 직접 받은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은 이것을 장의 돌판에 새겨, 모세에게 건네 주셨다.

모세가 이것을 받아가지고 산에서 내려오니, 어찌 뜻했으랴,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아론에게 강요하여, 송아지를 만들게 하고, 이를 섬기고 있었다. 모세는 꼴을 보고 위인(偉人) 의분을 발하여, 장의 돌판을 땅에 내던져, 이것을 파쇄했다.

이에 이어서 하나님은 다시 산상에서 전처럼, 이것을 그에게 내어 주신 것이다.
십계명을 새긴 돌판은, 순금으로서 싸인 상자 속에 넣어진 , 위에는 양끝에 서로 다른 그룹이 배치되고, 그리고 그룹의 얼굴은, 각각 아래를 향하여 십계명의 돌판을 주시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룹 사이에서, 여호와는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십계명의 돌판은, 성소에 놓여져, 모세와 함께 황야를 진행하고, 여호수아에 의해 수호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기원전 600년경에 이르러,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이것을 가지고서 동으로 돌아간 이래, 드디어 행방을 없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느부갓네살 왕은 결코 무지몽매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함부로 이것을 파괴치는 않았으리라.

모세가 하나님께서 받은 십계의 돌판은 지금도 순금으로 싸인 상자 속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어디엔가 매몰되어 있으리라. 만약 이번의 전쟁의 결과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점령한 그리스도교의 손에 의해, 귀중한 유물이 발굴되는 같은 것이 있다면 필경 세계 최대의 발견일 것이다.
모세의 십계는, 하나님의 십계명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말한다.

세상에 절대적 존재자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이라는 것이 있을 없다.
모세의 십계는, 모세의 십계이다. 전에도, 후에도, 십계가 있었던 것이다.
많은 십계 , 지금부터 삼천 삼사백년 전에 이룩된 것이, 모세의 십계이다라고.

일찍이 영국의 어느 학자가, 하나님의 십계설 공격하려 일이 있었다.

너희들은 여호와께서 십계명을 돌판에 새겼다고 하지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찌 석공이랴.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은 석공은 아니시다. 그렇지만 누가 석공을 지으셨는가? 석공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어찌 석공이 있는 일을 없으시랴!

그들 신학자의 반대론에 대해서는, 마디로써 대답하면 족하다.
만약 그가 십계명의 내용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안다면, 여호와께서 몸소 위에 새겼을 것인가를 알기에 어렵지 않으리라.

함부로 십계명을 경시하는 일을 그치라. 몇천 년래, 이스라엘 율법의 근저로써, 또는 그리스도교적 복음의 본원으로써 존경되어 모세의 십계명은, 이것을 배운 후에, 가치를 정해야 것이다.


법률은 물론, 사회생활상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리고 고래세계에 우수한 법률은, 적지 않은 것이다. 중에서도, 특히 법률의 모범으로서 신기원을 만든 것이 오륙이 있다.

하나는, 모세보다 뒤늦기 거의 1500년으로서, 그리스에 출현한 드라콘의 법률이다.
그의 법률은 피를 가지고서 기록된 것이라고 하며, 엄격함으로써 유명하다.

100년에 솔론이 나와, 아테네에 유명한 법률을 실시했다.
솔론의 헌법은 드라콘의 법률과 함께 법제사상 간과해서는 귀중한 산물이다.

후에 이르러, 로마의 법률가인 유스티니아누스(저스티니언) 나와 완비(完備) 로마법을 제정했다.

다시 근세에 이르러, 세계 국민을 지배하는데 감화력을 가진 것은, 확실히 나뽈레옹 보나빠르떼의 제정에 의한 법률이다.

이처럼 수종의 우수한 법률 있어서, 세계에 있어서의 오늘의 법률의 기초를 만든 것이라 하지만도,
시대에 있어서,
성질에 있어서,

훨씬 이들 법률을 능가하는 것은 실로 모세의 율법이었다.

시대에 있어서는, 구주(歐洲) 최고(最高) 법률보다 앞서기 천오백년, 지금부터 삼천 삼백년 내지 사백년 전이다.

성질에 있어서도, 모세율에 놀라운 특징이 존재함은, 법학자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분명한 사실이다.

먼저 대체의 형태에 있어서 것인가?
이것을 전한 가장 오랜 것은 출애굽기 20장이다.

그러므로 장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돌판 위에 새겨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신명기 56 이하, 또는 64 이하, 또는 10 4 이하 등에 있어서, 조금 내용을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돌판 위에 새겨진 언어는, 이중의 주요점 뿐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은 근거 없는 상상은 아니다.

생각컨대 모세율의 근저라는 것은, 그렇듯 상세한 규정이 아니고서, 하나님은 간결하고도 힘찬 말로서, 요점만을 새겨놓았으리라.

유명한 동양학자 에발트가, 위에 새겨진 말로서 추정한 십계명 전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너나 앞에 외에는 아무것도 신으로 하지 말라
2. 너는 위해 어떤 우상도 새기지 말라
3.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이를 거룩하게 지키라
5.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6. 너는 살인하지 말라
7. 너는 간음하지 말라
8. 너는 도적질하지 말라
9. 너는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
10. 너는 이웃집을 탐내지 말라

(출애굽기 20;1-17;신명기 5:6-21)

히브리어의 귀함은, 심원한 사상을 간결한 말로서 발표할 있는데 있다.
그러므로 영혼이라든가, 도덕을 말하고자 함에 있어서, 히브리어보다 나은 것이 없다.

강한 마디 중에는 우리들의 , 세말을 포함시킬 수가 있다.
그리고 위의 십계명 , 다수는 극히 간단한 말이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도적질하지 말라, 모두 불과 두마디 말로서 표시된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 것은 lo tirzah 티르짜이다.
기타 어느 것이든 lo 말라 글자로써 시작하여, 그리고 힘찬 짧은 말이 이에 잇달아 있다.

그러므로 장의 돌판 위에 , 강한 lo라는 말이 엄연히 나열된 것이리라. 이러한 율법을 손에 가지고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것을 이스라엘 전민중의 목전에서 발표한 때의 엄숙함은, 이를 상상할 수가 있다.

십계명, 실은 십어(ten words)이다. 십어를 중심하여, 줄지어 놓은 간단하고도 강렬한 율법이다.

십계명의 구분을 어떻게 것인가에 대해서는, 종래 그리스도계에 적지 않은 의론이 있었다.

어느 계명까지가, 첫째판에 기록되었을까?
십계명을 대별하여,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사람에 대한 의무로 나눌 있음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의 판중, 첫째에는 전자가 둘째에는 후자가 기록되었으리라고 상상할 수가 있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하나님에 대한 의무이고, 어디부터가 사람에 대한 의무일까?
문제에 관하여, 오랫동안 있어 해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의견이다.

그는 이상에 십조 , 처음의 2조를 첫째 계명으로 하고, 이하 순차로 당겨가다가, 최후의 열째 계명으로서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신명기 5:21-) 일조를 부가했다.

그리고 첫째 내지 셋째의 삼조를 하나님에 대한 의무로 하고,
넷째 내지 열째의 7조를 사람에 대한 의무로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앞서서,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는, 자신이 유대인인 입장에서, 가지의 구분을 세상에 제공했다.

앞에 게재한 십조 ,
넷째까지가, 하나님에 대한 의무이고,
다섯째 이하가, 사람에 대한 의무라는 설이다.
그리고 후세 프로테스탄트 제교회는, 거의 설을 채용한 것이다.

이러한 허다한 구분법이 있지만, 달리 누구도 배척할 없는 명백한 구분법이 있다.
그것은 십계를 나누어, 5조로 하고, 5조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이고, 5조는, 사람에 대한 의무라고 하는 것이다.

구분은 매우 단순할 아니라, 모세의 율법 , 5 5조를 합하여 십조가 되게 하는 습관이 있음에 의해, 일층 확실해 지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조항은, 어째서 다섯째에 오는 것일까?
이는 사람에 대한 의무가 아니랴?

대답한다면, 모세율에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의무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이다.

사람이 부모를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보는 사상에서라고. 이스라엘 백성은, 고래로 굳게, 사상을 취하여, 부동했던 것이다.

누가 말하랴! 그리스도교에 충효도덕 없다고.

그리스도교의 근저인 모세의 십계명 , 부모를 공경함의 의무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교적 도덕을 가지고서, 효도에 냉담하다고 하는 것은, 아직 그리스도교의 본원을 모르는 자이다.

모세의 십계명은 부모를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공경하라 가르치시는 것이다.

너는 외에는 ( 앞에) 다른 신들을 (아무 것도) 두지 말라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이라 하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함부로) 일컫지 말라 하신다.

이다.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안다.
모세 율법의 1(첫째 계명) 하나님에 관한 규정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관념없이, 법률의 관념 있을 없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종교심 있고, 그런 후에 법률의 준봉(遵奉) 있다. 이는 유대법상 움직일 없는 근본 관념이다.

세계 어느 법률이, 1조에 하나님을 말한데가 있는가?
종교에 냉담한 자는 법률가 중에 많다. 그런데 다만 모세율은, 법률의 근저를 종교에 두고,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법률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도덕에 관하여, 역시 그렇다.
윤리학자의 사상은, 법률가에 비하여, 조금 성실한 것이라 할지나, 하나님을 중시치 않는 풍조에 이르러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윤리는, 전적으로 종교를 가미치 않은 윤리이다.

그렇지만 모세율에 의하면, 도덕도 또한 하나님께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을 , 비로소 사랑의 (진정한) 도덕이 있다. 도덕의 근저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종교 없이 도덕 있으나 마나이다.
도덕 없이 법률 있으나 마나이다.
하나님의 관념은, 도덕과 법률과의 기초이다.

참신(하나님) 모르고서는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존립할 없다는 . 이는 모세의 십계명의 정신이다.

그런데 근대의 법제는,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하나님을 돌아도 보지 않는다. 이자 어느 것이 과연 참인가?

법률도덕의 근저를 하나님께 구하는 삼천 수백 전의 모세율과, 하나님 없는 현대의 법제와, 과연 어느 것이 참인가?

일은 심판 날에 이르러, 모두 판명되리라.
여하간에, 모세의 십계는, 사회생활의 근저를 외로운 하나님의 관념에 두는 것이다.

십계는, 이것을 전후의 5(5계명) 반분하여 하나님께 대한 의무 사람에 대한 의무로 수가 있다. 그리고 조금 주의하여 ( 계명) 순서를 관찰하면, 하나님 또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마음의 태도가 절로 속에 명시되는 것이다.

먼저 사람에 대한 의무를 보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도적질하지 말라이는 모두 사람의 행위로써 하는 죄에 대한 계명이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말로써 이웃의 명예를 해치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입으로써 하는 죄에 대한 계명이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아직 행위로 나타나지 않은 심중의 죄에 대해서 말한다.

이는 의사의 죄에 대한 계명이다.
행위로써 이웃을 침해하지 않고,
(언어)로써 침해하지 않고,

이를 침해하려는 악의를 품지 않는 ,
행위와 언어와 의사,
이웃에 대한 완전한 의무는, 가지에 있어서이다.

그리고 같은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의무인 5 중에 보이는 것이다.

너는 앞에서 외에 아무 것도 신으로 하지 말라(너는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한글역)

너는 자기를 위해 아무런 우상도 새기지 말라(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한글역)
이는 모두 신앙의 문제, 의지에 관한 계명이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한글역), 언어에 관한 계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이를 거룩히 지키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행위에 관한 계명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성실한 의사와 (언어) 행위로써, 섬길 것이다.

이웃에 대하여서도, 행위와 언어와 의사로써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란다.

성서는 때때로 이러한 수사법을 써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기억을 쉽게끔 해준다.
수사학 상에 있어서 말하는 소위 Introversion이다. (주관의 세계에 절대의 가치를 인정하는 , 내향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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