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얻은 안식 3
성 경: [히 4:8-13]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안식'의 개념은 가나안 땅의 정착을 의미했다.
(신 3:20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
12:9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25: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수 1:13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그래서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진 후에는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나타난다.
(수 21:44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
22:4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그러나 본절에서는 구약의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에 들어감'이라는 전통적인 안식과
시 95편에서의 '내 안식'사이에 차이점이 발생한다(Lane).
전통적인 안식의 개념인 가나안에서의 정착은
진정한 의미의 안식에 대한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실체인 다른 안식을 상징한다.
만일 여호수아에 의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시 95편에서 안식에 대한 새로운 약속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완전한 안식에 대한 상징으로서
진정한 안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
한편 '여호수아'(예수스)라는 명칭은 '예수'라는 헬라식 발음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관관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처음 '예수'(예수스)는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나
나중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심을 암시한다(Morris).
[히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본절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에 대한 결론으로 6a절과 구조적으로 병행을 이룬다(Lane).
(6a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6a절 | (아폴레이페타이 티나스 에이셀데인 에이스 아우텐)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
본 절 | (아폴레이페타이 삽바티스모스 토 라오 투 데우)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결국 본절은 6절에서 내려진 결론을 다시 반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에 사용된 '안식'의 헬라어 '삽바티스모스'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세가지이다.
(1) 이것이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역적이며 세상적인
의미의 안식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chanan).
(2) '삽바티스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완수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누리는 안식을 의미할 수 있으나,
(신 25:19 그러므로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소유하게 하시는 땅에서 주 네 하나님께서 사방에 있는 네 모든 원수들로부터 너를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릴지니라. 너는 그것을 잊지 말지니라),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영적인 의미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Hewitt, Rendall).
(3) 이것이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안식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Justin, Hofius).
여기서는 '삽바티스모스'를 '축하한다'라는 뜻의 동사 '삽바티제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안식'이라는 의미보다
미래에 누릴 '안식하는 즐거움'을 강조한다.
세 가지 중(1)의 견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영적인 안식을 강조하는 본서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타당치 않으며
그외 나머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삽바티스모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서
그 안식이 기쁘고 즐거운 것임을 나타낸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히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그리스도'로 해석한다(Ebrard, Alford, KJV, LB).
(2)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한다(Morris, Hewitt).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장의 전후 문맥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들어간'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누리게 된 안식의 시제성은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하늘나라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안식을 누리고 있으나
아직 완전한 안식을 누린 것은 아니다.
완전한 안식은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Morris).
[히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힘쓸지니'는 '재촉하다',
'열심히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의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지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6절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암시한다.
(3:17-18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스라엘의 불순종 행위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가져다 주는 모델이다.
여기서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데이그마티'는 '본보기', '복사본'을 뜻하는 것으로
저자는 본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한 것을
경계로 삼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함을 권면한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으나(Hewitt),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킨다(Robertson, Morris).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는 표현은 그 '말씀'이 '인격성'과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함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약속된 말씀을
성취케 하는 말씀이다(Hewitt, Morris).
▶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씀으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한다(Trompf).
그 말씀은 '검'과 같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불순종할 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마카이란)에 패배(敗北)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민 14:43-45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 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악독 등의 온갖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Hofius, Lane).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혼과 영', '관절과 골수'는 인간의 구조로 명명되는 '삼분법'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전체적인 본성을 말하는 수사학적(修辭學的)인 표현이다.
(Bruce, Morris, Robertson).
한편 '찔러'는 '꿰뚫다'라는 의미로 인간의 영혼과 육을 분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잠재된 의식까지 들춰내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Bruce, Robertson).
또한 '감찰하나니'는 법정 용어로서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인격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함을 시사한다.
(시 95: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 '지으신 것'이란 '창조 행위',
혹은 '물질적인 우주'와 '영적인 존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가리킨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한편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는 본문에만 사용된 형용사로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마음과 뜻을 감찰하시는 능력이 있어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남을 시사한다.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시야에서 모든 창조물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식적인 사실이었다(Lane).
▶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는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에게'라는 의미로(Morris),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시사한다(Robertson).
한편 '드러나느니라'는 '목(트라켈로스)을 뒤로 젖히다'라는 의미로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의 목을 감아 뒤로 젖히는 행위나 짐승을 잡기위해
뒷덜미를 젖혀서 목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표현이다(Morris).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어떤 것도 은폐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저자는 12절과 본절의 문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다는 것은(12절)
하나님 자신 앞에 드러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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