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진들
성 경: [히 11:4-10]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저자는 2절에서 언급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에 대한 실례를 본절에서
시작하여 31절까지 나열하고 있다.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 본절은 창 4:3-5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창 4:3-5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세기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悅納)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신 것으로 나타나며 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70인역에 따르면 가인의 제물이 거절당한 이유가 제사 절차상의 결함,
즉 가인은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을 나누는 법대로 나누어 놓지 않았고
아벨은 제사 법대로 바르게 제물을 잘라서 드렸기 때문이라고 한다(Aptowitzer, LXX)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또한 필로에 의하면 아벨의 제물은 생명체였던 반면에 가인의 것은
생명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요세푸스는 가인의 행동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밝히고 있다.
즉 아벨이 드린 제사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였다(Morris).
따라서 아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은 것은
자신이 드린 제사를 통해 나타난 믿음 때문이었다.
▶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 이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한 사실을 가리킨다.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즉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믿음과 의로움을 그가 드린 제물을 열납하심으로 증거하셨다.
▶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본문은 창 4:10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을 암시한다.
창세기에서는 '핏소리'로 되어있는 반면 헬라어 본문에는 '디헤스'('그것을 통하여')로
되어있다.
'헤스'는 '믿음'을 뜻할 수도 있고 '제사'를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대로 아벨이 드린 제사가 그의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믿음이든 제사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벨은 죽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준다. (Lenski).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본절은 창 5:21-14에 나오는 에녹에 관한 인용이다.
(창 5:21-24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맛소라 본문에는(MT)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되어있는 반면
70인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니'로 되어 있다(창 5:24, Bruce, Morris, Lane).
이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움 받았음을 암시한다.
저자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옮기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믿음으로'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이나 유대 전승에서는 에녹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유대 전승에서 모든 세대의 회개의 표본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시락의 교회서 44:16, Lane, Bruce).
저자가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개종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믿음은 회개와 동일시 될 수 있으므로 유대 전승에서
회개의 표본으로 나타났던 에녹은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될 수 있다(Luhrmann).
에녹의 믿음은 그가 옮기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본 요인이었다(Lane).
▶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본문은
에녹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근거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 5:22-24의 인용이다.
(창 5:22-24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맛소라 본문(MT)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창 5:22,24)
70인역에서는 이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뿐만 아니라 에녹에 관한 유대 전승마다 나타나는 어구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임을 나타내고 있다(시락의 교회서 44:16;지혜서 4:10,14).
저자는 '믿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연결지어 다음 절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저를 옮기우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그가 계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실존적(實存的) 존재를 뜻한다(Bruce).
(2)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상 주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다포도테스'는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Bruce).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시 43: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경고하심'의 헬라어 '크레마티스데이스'는 '신적인 의사 소통'.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 혹은 '신탁'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12: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계시를 액면 그대로 믿었음을 반증한다.
즉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1절).
한편 '경외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라베데이스'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두려움'이란 의미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다'를 의미한다(Robertson).
'율라베데이스'는 '거룩한'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고 '두려움'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으나 전자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노아가 두려움에 못이겨 방주를 예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준비하였기 때문이다(Morris).
▶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 '이로 말미암아'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by his faith, NIV, Robertson).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으나(Bruce)
노아의 믿음은 옳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세상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정죄받았다.
결국 노아의 믿음은 그 당시 사람들의 불신앙을 정죄한 것이었다(Morris).
한편 '믿음을 좇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피스틴'은
노아의 의가 실현되는 방법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아가 믿음이라는 규범을 따라 하나님에게서 의를 수여받았음을 시사한다.
노아는 믿음을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였다. (Bruce).
(창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따라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는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수여하신
의를 공유하고 상속하였음을 시시한다(Lane).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 저자는 본절에서 19절까지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앞서 언급된 아벨과 에녹, 그리고 노아는 그 믿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구약 성경에 없어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에서
그의 믿음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즉시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음을 시사한다(Westcott).
순종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아브라함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창 12:1)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즉시 길을 떠났으며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인지 모르고 있었으며,
(창 12:5-6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다시 가르쳐 주신 후에야 알았다.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은 찾아가야 할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
[히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우거하여'는 나그네처럼 기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하였으며,
(행 7: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헤브론 근처의 막벨라 밭을 사라의 매장지로 사기전까지는
*참조 : (창 23장)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그와 동일한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장막에 거하였으니'는 완전히 정착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약속해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실 것을 굳게 믿었다.
(창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히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
본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나타낸다.
'터'는 '기초'를 의미하는 것으로 '터가 있는 성'은 9절의 '장막'(스케나이스)과
상반되는 표현이다.
장막은 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동하기 위한 임시 거처인 반면에
'터가 있는 성'은 한 곳에 고정된 영구한 집이다.
이 성은 지상에 있는 어떤 도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동치 못하며
장차 올 영원한 하늘 도성으로(Bruce, Lenski)
(12: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13: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하나님에 의해 견고히 세워진 '시온 성'을 암시한다. (Lane).
(시 48:8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
87:1-3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2)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3)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5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사 14:32 그 나라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
33:20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한편 '경영하시고'는 '기술'을 뜻하는 '테크네'에서 파생된 단어로
'기술자', '설계자' 혹은 '건축가'를 뜻한다.
이를 앞서 언급된 '성'과 결부시킬 때 본절에서는 '설계자'나 '건축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으실'의 헬라어 '데미우르고스'는 '사람의 무리'를 뜻하는 '데미오스'와
'일'이란 뜻의 '에르곤'의 합성어로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자'의 뜻을 지닌다.
이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을 건축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손수 지으신 하늘나라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음을 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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