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0일 월요일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제사장 멜기세덱

 

성 경: [7:1-10]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 본절은 창 14:17-20에 대한 언급으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해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4:17-20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살렘 왕이요 -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킨다.(Morris, Lane, Vincent, Winter).

 

(76:2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 제정(祭政)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에 왕이

제사장 직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최고의 하나님'이란 의미로(Hewitt)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성을 암시한다(Lane, Hanlon, Philo).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이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제사장으로 인식하여 십일조를 그에게 바친다.

 

(14:19-20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 14:17-20(LXX)에서는 '아브람'으로 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아브라함'으로 되어 있다.

이런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저자는 본절의 내용을 70인역에서 인용한 듯하다(Lane).

 

한편 저자는 인용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연합한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에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한 부분은 삭제하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사건과

아브라함이 얻은 것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준 사건만을 언급하고 있다.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이러한 변개를 통해서 저자는 4-10절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탁월함을 강조한다.(Lane, Williamson).

 

 

[7: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저자는 본절에서 멜기세덱의 두 가지 칭호를 제시한다.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 '멜기세덱'의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왕은 의롭도다'이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미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여호와 우리의 의'로 부른 것과 연결된다.

 

(23: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 '살렘'이라는 지명(地名)'평강'을 의미하는

'샬롬'과 동일한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 '평화'로 번역될 수 있다(Morris).

 

장차 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평강의 왕'이라 칭한 것과 연결된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저자는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참된 평강을 주러 오셨으며,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자신의 의를 통하여 공의가 넘치는 나라를 완성하며 다스리신다.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11:1-5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7: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에는

사생아나 천한 신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경우에 따라

성적(性的)인 것을 초월하여 태어난

신적인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Morris).

 

이것은 저자가 멜기세덱을 천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에 멜기세덱의 부모에 대한 언급이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없음을 나타낸다(Lane).

 

멜기세덱의 부모와 족보가 없다는 사실은 그의 탄생이

기적적으로 되어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제사장적인 특질을 설명하려는 것으로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탄생이나 족보와 같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확립된 것이거나 레위계통의 제사장직의

승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 (Lane, Horton)

 

(5:5-6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 저자는 멜기세덱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언급이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에 착안하여

그의 제사장직이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것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임을 나타낸다.

 

저자는 이러한 예표와 강조를 통해서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는

다른 제사장임을 진술한다(Spicq).

 

'방불하여'의 헬라어 '아포모이오메노스''유사하여'라는 의미로

멜기세덱과 하나님의 아들이 외형적인 형태에 있어서 유사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본문은 창 14:18-20의 내용에 대한 해석인

110:5(LLX)'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저자는 시110:5(LLX)'영원한'(에이스 톤 아이오나)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항상'(에이스 토 디에네케스)으로 변형시켰다.

 

(110: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이런 변형은 저자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Lane).

 

 

[7: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4-10절까지는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함을 논증한 진술이다.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 '어떻게 높은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펠리코스'는 영탄법(詠嘆法)으로

멜기세덱의 위대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일체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략물 중 좋은 것''쌓인 것들 중에 가장 높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표현으로

전리품 중 가장 좋은 것을 받은 멜기세덱의 권위를 시사한다.

 

아브라함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존재이다.

이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다는 사실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멜기세덱에게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십일조를 드렸음을 나타내며,

멜기세덱이 레위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위대하고 우월함을 암시한다(Cockerill).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 저자는 본절과

6절에서 십일조에 관한 문제를 놓고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 멜기세덱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논증한다.

 

율법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칠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레위인들은 다시 그들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주도록 의무화하고 있었다.

 

(18:26 너는 레위인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아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이런 제도는 바벨론 유수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10:38-39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

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모두가 백성에게서 십일조를 받아 기업으로 삼았다.

 

한편 '허리에서 난 자'에서 '허리'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활동을 위한 준비 태세'

 

(왕상 18: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힘의 근원'을 의미하기도 하나

 

(2: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본절에서는 잉태와 출산에 관련된 생식 기능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라 할지라도

제사장들은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일조를 취했음을 나타낸다.

즉 제사장들이 백성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형제로서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이며 그들이 십일조를 걷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율법이 그렇게 명시하고 있기 때문임을 나타낸다. (Morris).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취하고 -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율법에 의해 십일조를 거두었으나

멜기세덱은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14:18-20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저자는 앞절과 본절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과 멜기세덱을

십일조를 받는 문제로 비교하여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멜기세덱이 훨씬 우월한 존재임을 진술하고 있다.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 '그 약속 얻은 자'는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을 빌어 주었다.

 

(1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14:19-20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고대 사회에서 축복의 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신분상(身分上)으로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Morris).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사실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7: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 '논란의 여지 없이'는 저자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확실성을 강조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

 

한편 '높은'의 헬라어 '크레이트토노스'는 비교급으로서 '더 나은', '더욱 탁월한',

혹은 '더욱 위대한'이란 의미로 본서에 자주 사용된 용어이다.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22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8: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절의 이런 '비교급' 표현은 창 14:18-20의 내용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1)이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보다 더욱 위대한 존재였음을 암시한다(Cockerill).

 

 

[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 6,7절에서 멜기세덱을 아브라함과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더 위대함을 논증한 저자는

 

본절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을 가리키는 '여기는'과 멜기세덱을 가리키는

'저기는'을 통해서 표현된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십일조를 백성에게서 받았으나

멜기세덱은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로서 십일조를 받았다.

 

여기서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는 저자가 3절에서 언급한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성경은 멜기세덱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죽을 수 밖에 없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7: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 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멜기세덱 제사장에게는 아브라함을 통해 십일조를 바쳤다.

 

'할 수 있나니'는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등장하는 저자 특유의 표현이다.

본서의 저자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길게 다루지 않고 주위를 환기시켜 간결하게

끝맺고자 할 때 이런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Lane, Westcott, Morris).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된 '레위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진술에 대한 이유임을 시사한다.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 레위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그러기에 레위가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할 수는 없으나

레위를 대표하는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으므로

그것은 곧 레위가 바친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Lane).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는 레위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동시에 아브람함의 후손(後孫)임을 암시한다.

 

비록 레위는 태어나지 않았고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조상을 말할 때 그의 후손까지 포함하였기 때문에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레위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레위가 바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저자는 그리스도의 모형인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결국에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시사하고 있다. (Mo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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