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2
성 경: [히 6:4-12]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 한 번 빛을 받고 - 저자는 4-8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背道者)의 결말에 대해 경고한다.
본절과 다음절은 개종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 다소 난점이 있다.
'비췸을 얻고'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벧후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로 해석을 한다.
▶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하늘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 된다(Morris).
▶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킨다(Lane, Bruce).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듯하다(Morris, Hewitt).
한편 '내세의 능력'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Lane, Morris).
이와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이다.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 '타락한 자들'은 4,5절에서
언급한 영적 체험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하였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가리킨다.
(4-5절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1) 본절은 다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든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뜻하는 바는 '다시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타락한 자들이 일회적인 회개를
다시 반복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Morris).
(2) 저자는 구약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본절의 '타락한 자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자임을 의미한다(Bruc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시사한다.
[히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개역 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절과
다음절이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받고 -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5:1 이하의 '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유사하다(Bruce).
(사 5: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며
(마 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 44: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55: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Hewitt, Morris, Lane).
[히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 본절은 배교자에 대한 비유이다.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 18의 내용과 연관된다.
(창 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이었다.
본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배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그것의 '마지막' 즉 결과는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다.
'불사름'은 마지막 심판 때의 엄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도구가 된다.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 저자는 4-8절에서 배도자들의 결국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엄숙한 경고를 하였으나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자신이 말한 그러한 배도자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는 본서에서 오직 본절에서만 사용된 표현으로
수신자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 어린 호칭이다.
▶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 '이보다 나은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크레잇소나'는 저자가 4-8절에서 언급한
배도자의 상태와 관련된 것으로 수신자들을 배도자와 비교할 때
훨씬 좋은 상태 즉 배도자들이 받는 저주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상태에 있음을 시사한다.(Hewitt, Morris, Robertson).
한편 '구원에 가까운 것'은 수신자들이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배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결코 배도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선행의 열매가 있었다.
(10절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시키고 있다.
[히 6: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이름'이 그 이름을 소유한 자의 전인격을 대표하는 것이었다(Morris).
본서의 수신자들은 선행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즉 그의 전인격을 나타내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계속적으로 섬겼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수신자들의 행위를 기억하신다.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수신자들의 행위를 근거로
앞절에 언급된 확신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Hewitt).
그들의 선행은 자신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고백되어지는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준다.
[히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
'간절히 원하는'의 헬라어 '에피뒤무멘'은 '열렬히 바라다'라는 의미로
저자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다.
저자는 '너희 각 사람' 즉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관심을 보이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 부지런하여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럼없는 삶, 즉 믿음에서 난 선행을 행하며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고 있다.
▶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끝까지'의 헬라어 '아크리 텔루스'는
3:14의 반복으로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한다.
(3:14 우리가 우리의 확신의 시작을 끝까지 확고히 붙들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 되리라)
즉 이것은 '파루시아'(parousia, '그리스도의 재림')로 말미암아
그들의 소망이 완전히 실현(實現)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Lane).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한편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는 '온전한 소망을 지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참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롬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
25)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인내로 그것을 기다리느니라).
본절에서 ‘소망’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앞절에서는 '사랑',
그리고 12절에서는 ‘믿음’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세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함께 쓰여졌다.
(10:22-24 우리 마음이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23) (또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
24)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되;
롬 5:2-5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3)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고전 13:13 그런즉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으나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
갈 5:5-6 우리가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나니
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으되 오직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뿐이니라;
골 1:4-5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너희의 사랑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이요,
5) 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인함이니 이 소망은 너희가 전에 복음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들은 것이라;
살전 1:3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눈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하기 때문이니;
5:8 그러나 낮에 속한 우리는 정신을 차려 믿음과 사랑의 흉갑을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쓰자;
벧전 1:21-22 너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은 너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라.
22)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 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에 위의 세 요소가 필수 불가결함을 암시한다.
[히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게으르지 아니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 도드로이 게네스데'에서
'게으르지'의 헬라어 '노드로이'는 5:11의 '둔하므로'와 같은 단어로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5:11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말할 것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말하기 어려우니라)
따라서 본절은 5:11의 내용을 기능적으로 보완하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Lane).
즉 그리스도 도에 대한 초보자들은
말씀을 듣기에 게으르고 둔하여서 해석하기 어려웠다(5:11).
그러나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에서 부지런하라고 권면하며
동시에 본절에서는 게으르지 아니하여 말씀을 잘 이해하고
계속 성장하여 나아가기를 권면한다(Hewitt).
▶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란 13절의 아브라함과 같은 자들을 말한다(Bruce).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대해
오래참고 기다려 기업을 받은 자들이다(Lane, Grasser).
'기업으로 받는'이란 '확실히 소유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
즉 구원을 온전히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구약시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인내한 것을
예로 들어 수신자들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믿고 인내하여 소유하는 자가 되기를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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