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찾는 자
성 경: [잠 24:13-22]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14)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5)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9)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21)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
[잠 24: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 꿀을 먹으라 - 이스라엘에서도 꿀은 건강식품일 뿐 아니라
어린이들의 성장과 발육을 돕는 식품으로 알려졌다.
(사 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그러므로 순전하고 몸에 유익을 주는 물질인 꿀을
지혜를 대신하여 언급한 것은 매우 적절한 비유인 셈이다.
신약 성경에는 꿀과 함께 젖이
지혜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종종 사용되고 있다.
(고전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9: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히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잠 24:14]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 이는 1차적으로는
지혜를 따라 사는 자가 이 땅에서 누리게 될
영적, 육적 축복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영원한 내세의 삶
또는 그 축복에 관한 암시도 내포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구절의 '장래'는
'소망' 등의 용어가 메시야적 소망의
미래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가끔 나타난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창 49: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렘 31: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잠 24:15]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 – 이것은
한 개인인 의인의 가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의인의 가정을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는
하나님과 그분이 세운 계획 및 경륜을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가정과
그들의 모인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이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 '대저'는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이다.
악인이 의인의 가정이나 교회를 공격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의인의 궁극적 승리 때문이다.
'일곱'은 성경에서 완전수이다.
(잠 6:31 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어 주게 되리라;
26:16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욥 5: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마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따라서 '일곱 번 넘어짐'은 완전한 멸망을 뜻한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완전한 멸망인줄 알았지만
의인은 다시 재기(再起)하고 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끝내 일으켜 세우시기 때문이다.
▶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 반대로 악인은
한번 파멸에 처하면 회생할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재앙으로부터 재기하기란 불가능하고
그들에겐 그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15, 16절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의인은 승리를 거두지만,
의인을 억압하고 공격하는 자들은 바로 자신의 악행 때문에
넘어지리라는 것이다.
[잠 24: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
'즐거워하지'는
상대의 고통 따위를 보고 히죽 히죽 웃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며,
'마음에 기뻐하지'는
동일한 고통을 보고 웃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내적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비록 그 상대가 자신을 치고 공격하였던 자라도
이 같은 자세나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데
그 같은 마움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 상대방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잠 24:18]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 혹자는 '그 진노'를
원수의 악한 생각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이 원수의 악한 궤계까지도 변화시켜
새 사람으로 만들 때 그를 조롱했던 자가 당혹케 되리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무리한 해석이다.
그보다는 개인적 복수심에서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는 자세를 경고한 내용으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물론 성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멸망을 보고 기뻐함이 마땅하다.
* 참고 : 출 15장;
17:14-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 참고 : 삿 5장;
시 58:10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그러나 주의할 사실은 심판 주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A.P. Ross).
[잠 24:19]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 행악자의 득의(得意)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 원문 직역은
'악인들 때문에 스스로 분노하지 말라.‘
악인으로 인하여 분노할 수 있는 경우는 많다.
특히 온갖 악행을 저질러 놓고도
오히려 부귀와 권세를 누리며 사는 경우를 보면
참기 어려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본 구절은 그러한 경우에도 분노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다음 절은 이에 대한 이유를 적고 있다.
[잠 24: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 여기의 '장래'란 말은
땅 위에서 누리는 지속적인 축복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여생까지도 암시하는 듯하다.
악인에게는 장기적인 혹은 궁극적인 측면에서 보면
땅 위에서든지 하늘에서든지 누릴 축복이 없다.
잠시 축복을 누리는 것처럼 끝나버릴 것이다.
특히 본 구절에서 '장래'는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영생에 더 비중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악인 중 재앙도 없고 부를 누릴 뿐 아니라
고통도 없이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 야기된 갈등을 안고 쓴 것이 시편 73편이다.
[잠 24:21-22]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
하나님께는 물론이고
사회의 질서를 위해 세워진 왕에게도 복종하라는 내용이다.
▶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 이것의 해석은 쉽지 않은데
그것은 '반역자'로 번역된 '쇼님'이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명사의 동사형인 '솨나'는
'반복하다', '변화되다', '달라지다' 등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쇼님'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우선 RV는 '정치 선동가',
시리아역(Syriac)과 탈굼역(Targum)은 '어리석은 자들',
라틴역(Vulgate)은 '딴 길을 가는 자들',
델리취(Delitzsch)는 '다른 성향의 사람’
그외에 '달리 생각하는 자', '불찬성자' 등이 있다.
그런데 본 구절 전체의 강조점은
상반절이 묘사하듯 하나님과 왕에 대한 경외에 있다.
그렇다면 이것의 해석은 문제의 한 단어가 아닌
전체의 강조점을 존중하는 관점에서 되어져야 하리라 본다.
가장 무난한 해석은
본 구절을 여호와와 왕에 대한 경외를
부정적 표현을 통해 강조하는 내용으로 보는 해석이다.
그 경우 해석의 내용은 이렇다.
‘내 아들아, 주와 왕을 두려워하라’
(My son, fear thou the LORD and the king, KJV).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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