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자에 대한 경계
성 경: [잠 26:1-12]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오는 것 같으니라
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5)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6)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7)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8)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9)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10)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잠 26:1]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오는 것 같으니라
팔레스틴에서 여름에 눈이 내리는 적은 없지만,
설령 내린다고 해도 금방 녹아버릴 것이므로 무익하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는 봄부터 10월까지 비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추수철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데
그때 비가 내린다면 그것은 익은 곡식에 손상을 주어
도리어 해가 되며 심지어 불길한 징조로까지 생각되었다.
(삼상 12:17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
▶ 영예 - 내적인 가치를 뜻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외적인 가치, 곧 높은 지위 따위를 뜻한다고 봐야 한다.
미련한 자의 높은 지위는 여름의 눈이나 추수철의 비처럼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지위에 합당한 일들을 감당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자신의 욕심을 따라 그 지위를 남용함으로써
다른 많은 사람에게 불이익을 끼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잠 26: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참새와 제비같은 미물(微物)들도
이유나 목적이 없는 행동은 취하지 않듯이
인간 세계속에도 이유 없는 결과,
특히 악한 저주는 까닭없이 임하지 않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저주가 공의(公義)에 관계없이 마술 화살처럼 그 목적지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간다는 미신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이 같은 어리석음을 본 구절은 깨우쳐 주고 있다.
발람도 그같은 미신에 대한 강한 반발을 보인 바 있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민 23:8).
[잠 26: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본 구절은 어리석은 자는 당나귀나 말처럼 이끌기 어려우니
물리적인 힘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교훈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 특히 시 32:8,9에 비추어 볼 때,
(시 32:8-9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본 구절은 하나님의 계명에 둔하고 어두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지 않으려는 잠재적 본성을 지닌
인간 모두에게 주는 경고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잠 26: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 미련한 자에게서 나오는 말에
맞장구치다 보면 자신도 그 우매함에 물들 수 있다는 우려이다.
한편 사도 바울은 우매한 자들에게
맞서 대항하기 보다는 스스로 미련한 자처럼 되기도 했다.
그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하여 피전도자의 수준으로 낮아졌던 바
이것은 분별력 있는 낮아짐이다.
(고후 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에게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이는 분별력 없이 휩쓸려 들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잠 26:5]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외관상으로 볼 때 4절과 본구절은 서로 상반된 진술을 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련의 랍비들은 4절은 세속적인 논쟁에 관하여,
본 구절은 종교적인 논쟁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세속적인 논쟁은 피해야 하지만
종교적인 논쟁은 맞서서 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 다른 극단적인 랍비들은 4절과 본 구절의
논리적 모순을 전제로 본서 전체의 정경성을 의심하고 있다(Cook, Toy).
그러나 본 구절은 분명히 미련한 자에게 대답해야 할
경우를 제한함으로써 4절과 본 구절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4절이 미련한 자의 수준에로 떨어지지 말라는 소극적인 경고라면,
아마도 본 구절은 미련한 자와 헛된 변론을 나누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를 책망하고 그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라는
적극적 권면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잠26:6]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 소식을 전하는 일에는
두 발이 사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워진다.
보냄을 받는 자가 그 목적을 잘 수행치 못할 어리석은 자라면
그를 보내는 일은 두 발을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두 발을 자르는 일은 치명적인 해악을 연상케 하는데
이 사실은 '해를 받느니라'의 원문상의 의미와 잘 조화를 이룬다.
'해를 받느니라'의 원문 직역은 '폭력을 마시다'이다.
[잠 26:7]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본 구절 하반절의 의미는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상반절의 경우는 힘없이 달렸나니에 해당하는 '달르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1) '절름발이의 다리를 제거해 버려라'.
(마찬가지로 미련한 자가 잠언을 입에 올리지 못하게 하라, Grk.).
(2) '정상인의 다리는 절름발이의 그것보다 길다'.
(그처럼, 잠언이 미련한 자에게는 너무 높아 도달할 수 없다, Rashi).
(3) '절름발이가 춤 추는 것과 같이 ... '(Luther).
(4) '절름발이의 다리가 힘없이 달렸나니'(개역 성경, Ewald).
(5) '절름발이의 두 다리는 서로 같지가 않듯이 ... '(KJV).
이와 같은 여러 해석이 있으나,
어쨌든 절름발이의 걸음이 무기력하고 부조화 스럽듯이
미련한 자와 잠언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Ross, Toy).
[잠 26:8]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 돌을 물매에 매는 것 - 이 묘사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크게 둘로 나뉜다.
그 하나는 라틴역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석 같은 귀중한 돌 하나를
잡석(雜石)더미 위에 던지는 행위에 관한 언급으로 보는 해석이다. (Perowne, Clark 등).
또 다른 하나는 물매를 사용할 줄도 모르는 자가
돌을 물매에 묶는 모습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해석이다. (Whybray).
그러나 그 어떤 해석을 따르던 간에 어리석은 행위에 대한 묘사인 것만은 분명하다.
'영예', 곧 세상적인 지위를 미련한 자에게 부여하는 일은
지극히 어리석은 행위이다.
[잠 26:9]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 손에 가시나무를 들었을 경우
만취한 사람은 그 움직임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의 경우
잠언의 말씀을 읽거나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지적(知的)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적절히 활용할 수는 없다.
잘못 사용하고 잘못 적용하여 남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이 어리석은 자의 경우는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정확히 적용하여
상대로 하여금 깊이 교훈을 주는 지혜자와 대조를 이룬다.
(전 12: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잠 26:10]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
본 구절만큼 원문 이해가 어려운 곳도 많지 않다.
따라서 본 구절에 대한 번역은 다양한데
그 대표적이며 가장 바람직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궁수(弓手)는
어리석은 자를 고용하고 모든 나그네를 고용하는 자와 같다.‘
본 번역을 바람직하다고 보는 이유는 그 내용이 미련한 자의 행위 혹은 그 행위가 낳은 결과등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 문맥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 번역에서 '어리석은 자 ...나그네를 고용하는 자'란
궁수가 그 활을 생각없이 자기 멋대로 사용하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가진 바 능력이나 지위를 생각 없이 함부로 사용하는 자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 본 구절이 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잠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듯이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며
어떤 경고에도 불구하고 악한 행위를 반복한다.
토해 놓은 곳으로 발을 돌이키는 개의 비유는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죄를 반복하는 행위를 꼬집는 대목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잠 26: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스스로 미련함을 인정하는 자는 소망이 있으나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구제 불능에 가까움을 가르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통감하는 자는 새 출발할 가능성이 많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세리가 바로 그 모범이다.
그러나 자신이 완전하다고 믿는 자는
회개의 가능성이 희박한데 동일 비유의 바리새인이 바로 그 모범이 된다.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자신의 죄를 통감한 세리는
기대밖에 의인이라는 호칭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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